한 사람이 돌아갔다. 그가 살아냈던 89년의 삶(1932~2021)은, 유족들에게 남긴 말의 끝에 매달려 있는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그 사죄에 핵심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다. 선거구호로 외쳤던 '보통사람'은 결국 되지 못했던, 파란만장의 길이었다. 그가 걸어온 그 길을 8개의 날짜로 짚어, 의미를 음미해본다.
10월 26일 : 박정희의 죽음, 노태우의 죽음
노태우(이하 전직 직함 생략)는 1979년 10월 26일 전두환(당시 국군보안사령관)에게서 '대통령(박정희) 유고'를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두 사람은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당시 육군참모총장)가 김재규의 초대를 받았고, 시해사건 현장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 공명(共鳴)했다. 이런 전심노심(全心盧心)은 한달 보름 뒤 쿠데타로 이어진다. 그해 10월26일은 군인 노태우가 정치적 야심을 증폭한 날이었다. 이후 영욕(榮辱)의 널뛰기를 거듭한 삶을 살아낸 끝에 42년만에 눈을 감았다.
12월 12일 : 군사쿠테타의 주역
1979년 12월 12일 청와대 경호 임무를 맡은 30경비단장실에 하나회 장성들이 집결했다. 노태우는 이 자리에서 '정승화 연행'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그러나 그는 상황의 변화에 기민했다. 그날 정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제9보병사단에서 2개 보병연대를 빼내 서울로 투입한 것은 노태우였다.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성공한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이 되었다. 12.12사태는 1995년 검찰의 재수사로 16년만에 그를 감옥으로 보내는 중대 혐의 중의 하나가 된다.
6월 29일 : 직선제 개헌 발표
1985년 2월 총선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전두환은 간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야권의 시위를 제압하기 위해 전두환은 1987년 4월13일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 무렵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국은 더욱 험악해졌다. 6월 10일 노태우는 여당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됐다. 그러나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대적인 가두집회가 끊이지 않았고 정부는 군대가 주둔하는 위수령 발동까지 검토하는 상황이었다.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을 약속하는 ’제안‘을 선언한다. 이 제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여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 직책을 사퇴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전두환이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4.13호헌조치는 철회된다. 이 선언 이후 직선제 선거에서 노태우는 36.6%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6.29선언은 쿠데타 군인 출신인 ’그‘를 잠정적으로나마 전두환과 다른 시선으로 보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유연성과 온건한 면모가 여론의 지지를 얻어낸 셈이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6.29 선언은 철저히 전두환이 기획한 것이었고, 노태우는 그 역할극에 참여한 것일 뿐이었다. 어쨌든 이 정치적인 책략은 민주화의 중대한 진전을 낳은 모멘텀이 되었다.
6월 25일 : 의사 꿈 접고, 나라 지키러 육사로 갔는데
노태우는 1932년 당시 경북 달성군 팔공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6세때인 1938년 부친이 교통사고로 돌아가면서 어려운 가정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의대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경북중학교로 편입했다. 18세 때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의사가 되려던 그의 꿈은 급선회했다. 전쟁은 청소년기의 그에게 애국심을 돋웠다. 그는 학도병을 자원해 헌병학교에 들어간다. 전쟁 중인 1952년 1월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한다. 여기서 중학교 동창이었던 전두환을 동기생으로 다시 만난다. 6.25는 이 땅의 겨레에게 동족상잔의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노태우에게는 그의 삶을 180도 바꿀 ’쿠데타 동지‘와의 교분을 쌓는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군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 핵심으로 활동한다. 이 군인들의 사조직은 곧, 나라를 말아먹을 군홧발의 야욕을 돋우는 불온한 네트워크로 진화한다.
5월 18일 : 비상계엄 실시 주도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이듬해 봄 이들을 규탄하는 대대적인 대학가 시위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내려진다. 전국적으로 뜨거워진 저항운동은 오히려 더 격해졌다. 이튿날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일대에서 대규모 시민 항쟁이 벌어진다. 신군부 세력은 계엄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태우는 이런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 실시를 주도했다. 8년 뒤인 1988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1996년 노태우는 대법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행위가 포함된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선고받는다.
9월 17일 : 88올림픽 개최의 수훈갑
1988년 9월17일부터 10월2일까지 서울에서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열렸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 9월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로 일본의 나고야를 제치고 서울이 선정됐다. 노태우는 이 선정을 향해 뛰었던 총책임자였다. 당시 제2정무장관이었던 그는, IOC에서 얻을 수 있는 표는 한국인 위원(김택수) 1표 뿐이라고 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역전시켰다. 서울올림픽은 노태우 정부의 상징이 됐다. 노태우는 “개최지가 바뀌면 잠실 메인스타디움 한복판에 사마란치(IOC위원장)와 IOC위원 81명의 무덤을 만들어 세계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은 모두 160개국이 참여하는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이 됐다. 이 당시 동구권 국가들에게 올림픽 참가를 설득하는 와중에 쌓은 교분으로 이후 동유럽 외교에서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1월 22일 : 한국 정치를 뒤흔든 3당합당
1990년 벽두에 한국 정치판에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다. 여당과 야당 2개당이 합당하는 사건이다. 당시 민주정의당과 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하나의 당이 된 것이다. 1988년에 실시된 13대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야3당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여소야대 정국이 출현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정권 교체의 리스크를 덜기 위한 묘책으로 야당과 합당하는 파격수를 쓰게 된다. 이런 정권의 제의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제1야당의 지위를 빼앗긴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었다. 또 신민주공화당은 의석수가 너무 적어 독자적으로 정국에 영향을 미칠 힘이 미약했기에 이에 동조했다. 이 정계개편 구상으로 야당은 평화민주당만이 남았고, 순식간에 여대야소 정국으로 바뀐다. 이런 변화는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고질적인 정치구도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여당과 야당간의 이념 대결이 치열해진 것은, 노태우의 정계개편 구상에서 원초적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당 합당이 없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권력 이동은 또다른 양상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10월 27일 : 뇌물을 자백한 날
노태우 전대통령이 타계한 날 바로 뒷날 또한 의미심장한 날이다. 1995년 이 날 그는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집권 시절에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사실이라고 시인을 한다. 그는 “대통령 재직 때 기업인들의 성금으로 약 5000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1700억원 가량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그는 군사쿠데타와 5.18진압의 씻을 수 없는 오명에 이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 얼룩을 남기게 된다. 그해 11월 노태우는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나쁜 권력을 움직이는 건 나쁜 돈‘이라는 것을 세상에 확인해준 셈이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된 12월 22일, 노태우는 수감 2년1개월만에 특별사면되었다.
2000년대 들어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다. 그는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고 이후 병원을 들락날락하면서 연희동 자택에서 요양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고, 10월26일 40년 이상 동안 세상을 들끓게 했던 삶의 중심에서 가만히 빠져나갔다.
권불오년(權不五年), 대통령 퇴임 후를 기억하라
그 또한 삶 속에서 국가나 국민을 위해 나름으로 충정을 기울인 점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처음과 끝이 모두 떳떳하지 않았기에 그런 노력들마저 허망하게 묻히는 인생을 만들어냈다. 마침 다시 대선정국으로 달려가고 있는 2021년 말이다.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의하면 5년의 단임권력일 뿐이다. 그것을 가리켜 ’권불오년(權不五年)‘이라고도 한다.
대통령,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이토록 적실하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을까. 집권 과정이 떳떳하지 못했거나, 집권 이후의 정책들이나 행위들이 떳떳하지 못했던 많은 대통령들은 그 꼬리를 지우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의 전직 대통령 하나를 보내면서 그의 삶을 곱씹어 본다. 부질없는 후환(後患)을 줄여 역사에 내내 아름다운 대통령으로 남는 전례를 만들어갈 때가 이제는 됐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때가 아닌가. 우리 국민도 지금쯤은 그런 대통령을 만날 자격이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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