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樓亭)과 원림(園林)의 고장 담양에서도 명옥헌(鳴玉軒)은 분위기가 독특하다. 담양군 고서면 신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한 명옥헌. 후산마을을 가로질러 들어가야 하는데 그 길이 매우 흥미롭다.
마을 초입에 차량 차단기가 있고, 거기에 200년 된 느티나무가 떡 하니 서 있다. 바로 옆에는 저수지가 보인다. 아담한 저수지인데, 저수지 둑 한쪽에 왕버들 노거수 네 그루가 웅장한 모습을 뽐낸다. 나뭇잎이 무성한 계절에 가면 더 장관이겠지만, 지금 같은 겨울철에도 왕버들은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잎은 다 떨어졌어도 전체적으로 풍성한 수세(樹勢)나 육중한 몸피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이 그대로 전해온다.
근처에 후산리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가 30m를 넘을 정도로 육중하고 당당하다. 이 은행나무의 이름은 ‘인조대왕 계마행(繫馬杏).’ 여기엔 조선시대 인조가 말을 묶어 두었다는 일화가 담겨 있다.
후산리 은행나무를 옆에 두고, 저수지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든다. 걷다보면 나지막한 오르막이 나오고 그 낮은 언덕을 넘어서면 분지처럼 널찍한 공간이 쭉 펼쳐지며 명옥헌 원림이 나타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배롱나무 숲이다. 지금 같은 겨울철엔 잎이 져 맑은 갈색의 나뭇가지만 드러내고 있지만, 늦여름에 가면 온통 배롱나무 붉은 꽃들로 가득하다. 배롱나무 옆으로 연못이 보이고 먼발치로 작은 정자가 살짝 모습을 보인다. 바로 명옥헌 건물이다.
명옥헌은 오희도의 아들이 조성한 정원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오희도는 어머니를 따라 후산마을로 옮겨 살았다. 후산마을엔 오희도의 외가인 순천 박씨가 터를 잡고 있었다. 오희도는 광해군 때인 1614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서인과 북인이 힘겨루기 하던 광해군 연간, 오희도는 어수선한 정치판을 멀리하고 후산마을에서 조용히 살고자 했다. 그는 이곳에 작은 서재를 하나 지었는데 그 이름이 망재(忘齋)였다. 세상사를 잊어버리는 공간이라는 뜻. 세상과 절연(絶緣)하겠다는 오희도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능양군이 찾아왔다. 능양군은 오희도에게 반정에 동참해 줄 것을 청했다. 오희도는 이를 거절했고 후산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능양군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두세 차례 오희도를 찾아왔다고 한다.
오명중의 아들 오기석(吳祺錫·1651~1702)은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다. 오희도 가문과 인연을 맺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1673년 이곳을 찾았다. 정자 옆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본 송시열은 이 정자를 ‘명옥헌’이라 이름 짓고 바위에 ‘鳴玉軒 癸丑(명옥헌 계축)’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정자 옆의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명옥헌과 주변은 다소 퇴락했는데 오기석의 아들 오대경(吳大經· 1689~1761)이 연못을 확장하고 정자를 고쳐지었고 그 모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배롱나무를 더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옥헌 원림은 주변의 지세를 적극 활용했고 그렇기에 인공의 흔적이 별로 없다. 담양 소쇄원이 정교하게 구성되었다면 명옥헌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명옥헌은 크게 정자와 연못 2개와 물길로 이뤄져 있을 뿐이다.
명옥헌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한가운데에 방이 있고 빙 둘러가며 마루가 놓여 있다. 마루에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남도지방 정자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정자 마루에 걸려 있는 명옥헌 편액은 바위에 새겨진 송시열 글씨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마루 한편엔 ‘三顧(삼고)’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인조가 능양군 시절에 오희도를 두세 번 찾아왔던 일화를 기억하기 위한 편액이다.
정자 왼쪽으로는 물길이 흘러 내려온다.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은 두 개의 연못으로 통한다. 위의 연못은 작고 아래의 연못이 크다. 모두 사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연못 안에는 둥근 모양의 섬을 갖추고 있다.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 연못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명옥헌 뒤쪽에는 담양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 지냈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담백한 겨울 배롱나무, 오희도의 삶 떠올라
이런저런 매력이 많지만 명옥헌에서는 역시 배롱나무다. 아래쪽 연못과 정자 주변으로 넓게 펼쳐진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 여름에 꽃이 피면 100일 동안 지지 않는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늦여름 배롱나무가 만발했을 때, 명옥헌의 풍광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배롱나무의 붉은빛을 두고 누군가는 꽃물결이라 하고 누군가는 몽환적이라고 한다.
배롱나무는 꽃이 붉어 자미목(紫薇木)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롱나무는 붉고 아름답다. 붉은색이지만 그 농도가 지나치지 않아 그 붉음은 맑고 투명하다. 배롱나무는 꽃도 꽃이지만 전체적인 수세와 줄기의 모습이 품격 있고 고풍스럽다. 줄기는 곧은 듯 구부러지면서 가지가 넓게 퍼진다. 배롱나무는 자라면서 껍질을 벗어내고 매끄럽고 정결하게 변한다. 그래서 줄기와 가지의 표면도 매끄럽고 깨끗하다. 그 색깔 또한 은은하고 부드럽다. 한옥의 오래된 마루처럼 뽀얗고 정갈하다.
배롱나무꽃은 여름 더위에 맞서 100일을 견딘다. 추위나 서리를 견디는 매화나 국화 못지않게 맹염(猛炎)을 이겨내는 배롱나무 또한 선비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100일 동안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처럼 쉼 없이 수행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배롱나무 껍질은 아주 매끈하여 마치 껍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겉과 속의 일치를 상징한다. 즉 표리부동(表裏不同)이 아니라 표리일체(表裏一體)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다. 이 또한 선비의 상징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예로부터 배롱나무를 좋아했다. 특히 서원이나 정자 주변, 사찰에 많이 심었다. 그중에서도 명옥헌은 단연 두드러진다. 명옥헌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롱꽃 정원이라고 한다. 우리 땅 도처에 멋진 배롱나무들이 많지만 군락을 이루며 정자와 연못과 물길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명옥헌 배롱나무는 명품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맛볼 수 없지만, 대신 배롱나무의 수세와 줄기 가지의 정갈한 품격을 만끽할 수 있다. 푸른 잎과 붉은 꽃을 모두 떨궈낸 배롱나무의 담백함. 명옥헌 배롱나무를 보면 오희도와 오명중의 삶이 떠오른다. 다섯 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 오명중. 그 어린 아들이 성장해 아버지를 기리는 공간을 조성하고 배롱나무를 심었다. 그렇기에 명옥헌 배롱나무는 선비의 절개도 절개이지만 오명중의 그리움을 진하게 뿜어낸다. 아버지를 향한 오명중의 절절한 그리움 말이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 국립광주박물관 《담양》 통천문화사, 2015.
2. 국윤주 《독수정 명옥헌》 심미안, 2018
3. 신상섭 《한국의 아름다운 옛 정원 10선》 민속원, 2019.
4. 허균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다른세상, 2002.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