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위기의 장기화가 한국에 명예와 불명예를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나라로 인정되면서 해외에서는 G7 정상회의에 초청되는 ‘선진국’의 명예를 안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선도국가를 자부하게 되었다. 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문화강국 등극도 대한민국의 위상을 확인해주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 코로나 위기로 인해 대한민국의 ‘국가 소멸’이 더욱 빨라질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인구문제연구소가 예측한 바에 따르면 앞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통계청이 작년 12월 발표한 ‘2020〜2070년 장래인구추계’도 우리나라 인구 감소 속도가 기존의 전망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절박한 현실에도 2022년부터 새로운 저출산 대응 신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할 계획이라는 경제부총리의 예고는 ‘제대 말년 병장’을 떠올리게 한다. 나랏 곳간을 지킨다고 살아 있는 생명을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새로 태어날 생명의 수를 늘리겠다는 심보는 참으로 고약하다.
재정건전성 논리는 오늘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주요 선진국의 사회경제정책 동향에서 대한민국을 고립시키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욱이 팬데믹이 장기화하고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국면에서 재정건전성 논리는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명백한 오류다. 1930년대 대공황은 1929년 10월 발생한 주가 폭락에 뒤이은 경기 침체에 당시 공화당 후버 정부가 균형재정으로 대응하면서 장기화되었다. 대공황에서의 탈출은 대대적인 공공지출과 다양한 복지제도 도입, 노동권 강화 등으로 구성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로 가능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팬데믹의 발발과 함께 선진국들이 거의 동시에 천문학적인 재난지원금을 ‘살포’한 것도 바로 민생을 추스르고 경기 침체를 차단하기 위한 긴급조치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마저 모든 미국인에게 1000달러의 수표를 보내는 것이 “좋은 출발”이라고 평가한 것은 의외였다. 한국에서는 기재부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대신 낙수효과도 작은 수출 실적 개선을 긴급뉴스로 타전하면서 국민의 ‘국가주의 환상’을 부추기고 있다. 국가가 재정건전성을 빌미로 나라빚을 두려워하는 사이에 가계와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불평등은 심화되는 재난자본주의가 풀가동되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위기 상황에서는 빚을 내서라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노력이 국가의 마땅한 도리이자 존재 이유다. 국민이 평생 갚아야 할 빚을 내야만 살 수 있는 나라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라가 국민을 포용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국민도 나라를 거부한다. 그래서 시위를 하거나 이민을 가거나 후손을 낳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재정건전성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론’의 구성 요소다. 이를 뒷받침하려는 경제이론이 바로 ‘구축효과’ 주장이다. 이는 민간과 정부가 한정된 자본을 두고 경합하던 1970~1980년대에는 일말의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처럼 금융자본이 과잉인 시대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은 허구 논리다. 효율적이지 않음에도 맹목적인 시장주의에 매몰되어 재정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는 암적 존재가 한국의 민자사업이다. 민자 지하철, 민자 고속도로는 물론 철도, 항만, 병원 등에 대한 민영화 요구가 팽배한 것은 자본 부족이 아니라 막대한 유휴 자본을 위한 투자기회의 부족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재정건전성은 국가를 금융시장의 논리에 굴복시키려는 이데올로기다. 오늘날 국가는 더 이상 중앙은행에서 무이자로 직접 차입하지 못하고 금융시장에서 이자를 지불하면서 차입해야 한다. 민간 신용평가회사들이 국가신용도도 평가한다. 금융시장은 이렇게 재정정책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회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다시 한국처럼 복지정책이 인색한 나라에서는 복지정책의 잠재적 수혜자를 금융자본의 ‘고수익 고객’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코로나 재난 상황에서 ‘건전재정’에 짓눌려 희생되는 낙오자는 국가를 대신하여 부채의 덫에 빠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시장에서 퇴출되는 행위자가 시장에 재진입하는 데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고숙련자일수록 그의 생산성이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는 개인의 비용인 동시에 사회적 비용이다.
원화는 태환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나라빚이 많아서는 곤란하다는 주장도 주무 부처에 책임을 추궁할 사안이지 건전재정을 주장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 통화의 태환성이 재정 운용의 폭을 그토록 크게 좌우한다면 ‘원화의 국제화’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진즉 했어야 했다. 더욱이 기재부가 스스로 ‘법을 만든다’는 위헌적 망상에 사로잡혀 ‘한국형 재정준칙’을 법제화하겠다는 흑심을 보이는 것은 미래 정부와 국민의 주권 행사에까지 재정 족쇄를 채우려는 ‘시험권력’의 오만한 몽니다.
건전성의 관점에서 나라빚을 평가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언제나 동태적인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다. 나랏빚 증가에 대해 세대정의 차원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비판이 ‘대물림’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의 일부일 뿐이다. 사실의 전부는 다음 세대에 빚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확충된 성장잠재력(인적자원 포함)으로 빚을 갚을 역량 또한 더 키워서 물려준다는 것이다. 현 세대가 살아야 미래 세대도 있을 수 있다.
세계화와 더불어 실종되었던 ‘국민경제’가 경제주권과 함께 되돌아오고 있다. 미·중 갈등과 팬데믹의 확산으로 후퇴하는 세계화는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기업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선택과 집중’은 이제 국내 산업을 포괄적으로 육성하는 ‘내재화 전략’으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다. 미국은 공급망 재편을 위해 30만명의 인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30년 걸리는 경제주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생명 존중의 ‘포용적 회복’(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사람 살 만한 나라가 되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단연 출생률일 것이다. 세계 최저의 출생률 0.84(2020년)를 끌어올리는 담대한 프로젝트는 재정건전성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살아 있는 생명을 존중하는 실천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