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지난 5일(이하 현지시간)부터 7일까지 열린 세계 최대 기술 전시회 ‘CES 2022’가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산에도 2년 만에 대면 행사로 열린 올해 CES에 참가한 기업 수는 2020년에 비해 반토막이 났다. 애초 참가를 확정한 기업들도 막판에 온라인으로 전환하거나, 부스를 철수하기도 했다. 그동안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던 중국 기업 수도 대폭 줄었다. 치열한 미·중 패권 갈등이 ‘미래를 가장 빨리 만나는 곳’ CES까지 영향을 미친 탓이다.
하지만 올해 참가 기업들의 ‘혁신 열정’은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경영학의 구루’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가 주창한 ‘파괴적 혁신’의 열띤 경연장이었다. 전자회사는 자동차에 뛰어들고, 자동차회사는 로봇을 미래 비전으로 삼는 등 산업의 전통적 경계가 무너지는 ‘빅블러’ 현상이 본격화한 것이다. 기술 융·복합화가 대세가 된 상황에서 기존 산업 패러다임으론 살아남기 힘들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다.
◆삼성 “업의 제한 없앨 것”···차 대신 로봇과 등장한 정의선, ‘메타모빌리티’ 비전 선포
이런 가운데 한때 ‘전자 왕국’으로 불리던 일본 소니는 전기차 사업 진출을 공식화 했다. 요시다 겐이치로 소니 CEO는 4일 "소니 전기차의 상업적 출시를 탐색하고 있다"면서 올봄 전기차 회사 ‘소니 모빌리티’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2년 전 CES에서 세단형 콘셉트카 ‘비전-S’를 공개했지만, 자회사 설립 발표는 전자 및 자동차 업계 모두에 충격이었다. 이에 전기차 실물 모델 2종을 전시한 CES 부스는 연일 인파로 북적였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자동차를 마치 사무공간처럼 쓸 수 있는 스마트 기술을 대거 선보였다.
현대자동차는 본업인 자동차를 넘어 로봇과 메타버스 기술을 접목한 ‘메타 모빌리티’를 새 비전으로 제시했다. 로보틱스와 모빌리티 기술에 메타버스를 결합, 로봇을 ‘대리인’(proxy)으로 삼아 메타버스에서 인간이 직접 할 수 없는 체험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로봇개 ‘스폿’과 함께 보도 발표회에 등장해 “넌 좋은 친구야”라고 말하며 로봇과의 동행을 예고했다. 실제로 이번 현대차 부스에는 자동차가 단 한 대도 없었고 로봇만이 관람객을 맞았다. BMW는 전자잉크 기술을 활용해 차량 외장 색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패션차를 선보였고, 농기계업체 존디어는 AI와 자율주행 기술을 접목한 완전 무인트랙터를 공개했다.
◆반도체 시장, 전통적 강자는 없다···핵심 사업, 무차별 경쟁 가속화
반도체 업계도 영역 파괴가 이어졌다.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 강자인 인텔은 신형 외장 그래픽처리장치(GPU) 아크를 HP, 델, 에이서 등 PC 제조사에 공급했다고 밝혔다. 외장형 GPU는 그동안 엔비디아와 AMD가 장악해왔다. 이에 엔비디아는 인텔과 AMD가 주로 만드는 그래픽 통합형 CPU를 경량형 노트북에 공급한다고 밝혔다.
모바일 통신칩 회사 퀄컴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손잡고 초경량 증강현실(AR) 글라스 등에 탑재할 AR 칩을 공동 개발한다고 밝혔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는 차량용 반도체 고객사로 르노, 혼다, 볼보를 추가 확보한 사실도 공개했다. 이미 차량용 반도체 강자인 인텔 자회사 모빌아이와 엔비디아를 긴장케 하는 대목이다. 퀄컴은 또한 SKT가 출사표를 던진 AI 반도체 ‘사피온’의 협력 가능성도 열어뒀다. 이번 CES 기간 아몬 CEO를 독대한 박정호 SK스퀘어 부회장은 “글로벌 ICT 경쟁 환경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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