⑰담양의 3대 자연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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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2-01-2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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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산에 서린 애국혼

담양에는 3대 자연유산이 있다. 유네스코에서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오묘한 형상을 보여주는 세 곳을 주민들이 이름하는 말이다. 첫째가 수북 들녘에서 바라보면 피라미드를 닮은 삼인산(三人山)이다. 해발 570m의 삼인산은 사람 인(人)자 3자를 겹쳐 놓은 형상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자연이 빚은 피라미드 모양의 삼인산[사진=담양군 제공]

두 번째는 추월산(秋月山·731m). 가을 밤에 바위 봉우리가 달에 닿을 듯 높아 보인 데서 추월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담양읍에서 보면 부처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한다. 단풍나무가 많아 가을의 추월산이 가장 아름답다.

추월산은 누워있는 부처를 닮았다고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불린다.[사진=담양군 제공]

세 번째는 1976년 완공된 거대한 인공호수 담양호. 담양호를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용 형상과 닮았다. 담양댐 옆에 용 조형물이 서 있다. 담양호는 1976년에 완공되었다. 담양호의 저수량은 6670 만톤. 추월산과 금성산을 옆에 끼고 있어 경관 빼어나고 물이 맑다. 나무다리를 건너 용마루길(3.9km)을 따라가다 보면 물속으로 잠긴 옛마을터도 만날 수 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담양호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사진=담양군 제공]

 영산강의 시원(始原) 가마골 용소

3대 자연유산에서 빠진 것을 가장 섭섭해할 곳이 영산강의 시원지인 용소(龍沼)다. 영산강은 호남 평야를 적시고 담양 광주 나주 영암 무안을 거쳐 장장 115km를 흘러가다 서해로 들어간다. 《신동국여지승람》 담양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는 용연(龍淵)에 대해 '매년 봄과 가을에 용에게 제를 올리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낸다’고 설명을 달았다.
가마골생태공원 관리사무소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출렁다리(시원교)가 용소를 가로지른다. 용연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으로 넓은 소(沼)를 향해 커다란 폭포가 물줄기를 뿜어낸다. 비가 많이 내리고 난 뒤에는 폭포가 더욱 장관을 이룬다.
담양군 용면 용연리 용추산(해발 523m)을 중심으로 사방 4km 주변을 가마골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물이 폭포로 떨어지면서 못을 이룬 곳이 용소다. 깊은 계곡과 폭포, 기암괴석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영산강의 시원인 용소. 가마골의 물줄기가 용소에 다다르면 폭포로 떨어진다. [사진=황호택]

이곳 골짜기에 그릇이나 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많아 지명이 가마골이 됐다. 1996년 용추사 주변에서 임도(林道) 공사를 하다가 가마터가 발견돼 국립광주박물관이 두 차례 발굴했다. 발굴된 기와에 물결 모양이 있어 15~16 세기에 용추사 기와를 굽던 가마로 추정된다.
가마골에서는 1953년 7월 27일 남북이 휴전한 뒤에도 1년 8개월 동안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1950년 가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국군의 반격으로 후퇴하던 전남·북 주둔 북한군 패잔병들이 가마골에 집결해 5년 가까이 유격전을 펼쳤다. 가마골은 산이 높지 않고 능선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어 골짜기가 많고 물을 구하기가 쉬웠다. 그래서 전남 노령병단이 거점으로 삼았다. 
미전향 장기수로 1952년 체포돼 옥살이를 하다 1989년 석방된 임방규는 전쟁 당시와 지금의 가마골을 비교하는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라는 책을 썼다. 가마골에는 김병억 사령관 휘하에 빨치산 3000명이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숨고 밤이면 민간 마을로 내려와 보급을 하고 국군을 공격했다. 유격대는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가마골에 군사간부를 양성하던 노령학원을 비롯해 탄약제조창과 정미소까지 설치해 놓고 끈질긴 저항을 했다. 대숲 안에 숨어있는 도당학교는 40 여 명 학생들에게 사회발전사와 조선유격전술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김병억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고향 장성에 갔다가 ‘트(아지트)’가 발각돼 마지막까지 싸우다 최후를 마쳤다.
 

도기나 기와를 굽는 가마가 많아 가마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용추산 자락에서 발견돼 복원된 가마터. [사진=황호택]


김병억 사령관 밑에 박판쇠 사단장(별명 백암동지)이 있었는데 전투력이 뛰어나 국군들이 백암부대를 두려워했다. 전쟁이 나기 전 13년이나 머슴살이를 했던 박판쇠는 글이 짧아 가마골에서 1951년 8·15 경축사를 몆 줄 읽다가 막혔다. 그러자 참모들이 써준 종이를 내려놓고 ”빨치산은 무엇보다 개를 잘 잡아야 합니다”며 보신탕으로 전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1955년 3월 육군 8사단, 11사단과 전남도경이 합동으로 가마골에서 화공전을 폈다. 노령병단은 1000여 명 사상자를 내고 궤멸됐다. 지금도 가끔 탄피, 수류탄, 무기 제조에 쓰인 야철, 화덕 등이 발견되어 치열했던 전투를 말해준다. 출렁다리를 건너 등산로를 따라가면 당시 김병억이 은거했던 ‘사령관 동굴’을  찾을 수 있다. 동굴 앞에 축대가 남아 있다.
 
김덕령 장군 부인의 순절

담양호 쪽에서 추월산(秋月山)을 바라보면 거대한 암벽에 암자가 제비집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추월산은 담양군과 전북 순창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731m지만 만만히 보았다간 혼이 난다. 경사가 가파르고 계단이 많다. 공사 중에 계단에 표시해 놓은 숫자가 800, 900으로 이어지다가 1000을 넘는다. 내려오는 길은 더 힘들다.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등을 돌려 담양호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면 한결 가뿐해진다.

담양호에서 바라본 추월산. 정상 부근 벼랑에 보리암이 제비집 처럼 매달려 있다 [사진=황호택]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가 나무로 만든 매 세 마리를 날려 보내 앉은 자리에 사찰을 지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 세 곳이 바로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 그리고 담양 보리암이다. 보리암은 장성 백양사의 말사다. 菩提庵이라 쓰고 보리암이라고 읽는다. 보리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추월산 들머리에 정유재란 때 보리암에서 왜군에 죽임을 당한 김응회 의병장과 어머니 창녕 성(成)씨의 순절비가 서 있다. 순절비는 왜군이 파죽지세로 몰려들던 임진왜란 초기의 전황을 숨가쁘게 적어 내려간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파천(播遷)하니 여러 고을의 수령 방백이 소문에 놀라 도망치고 고을의 백성들은 앞다투어 피난을 가는 혼란이 극에 달하매…’
산죽(山竹)이 추월산 곳곳에 널려 있다. 옛 시절에 산죽으로는 채반이나 광주리, 빗자루를 만들었다. 내 나이 또래의 안내인은 어렸을 때 부모가 산죽을 베어 장에다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말했다.
추월산의 맷돼지들은 산죽 숲에 새끼를 낳아 기른다. 산죽을 물어뜯어 댓잎을 쌓아 담요처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새끼를 낳는다. 맷돼지들은 사람을 만나면 먼저 피하지만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나 교미철에는 사람을 향해 덤벼드는 수가 있다는 안내인의 설명이다.

추월산의 멧돼지들은 산죽 숲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새끼를 기른다. [사진=강화원 씨 제공]

보리암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됐으나 1666년(현종 7년) 신찬(信贊) 스님이 중수했고,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710년(숙종 49년) 다시 여러 스님들이 힘을 합쳐 재건했다(법당 안 ‘보리암 중수기’).
법당 앞에는 솥같이 생긴 철제 드므가 있다. 화재에 대비해 물을 담아 두는 용도다. 겨울에 물이 얼어붙으면 쇠솥에 불을 때 언 물을 녹일 수 있다. 불귀신(화마·火魔)도 법당으로 다가오다 드므에 담긴 물에 비친 자신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도망간다는 것이다.
수령 700년의 느티나무가 기암절벽 위에서 수호신처럼 절을 지킨다. 두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연리목(連理木)이다. 부부가 이 나무 앞에서 소원을 빌면 금슬이 좋아진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보리암 앞에 있는 솥단지 모양의 드므와 7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사진=황호택]


보리암 입구의 계단 오른쪽 암벽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왜적을 꾸짖고 순절한 곳’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조선 현종 6년(1840) 담양부사와 광주(光州)목사를 지낸 조철영(趙澈永·1777~1853)의 글씨다.
‘金忠壯公 德齡夫人 興陽李氏 萬曆丁酉 罵倭賊殉節處 歿後 二二四年 庚子(김충장공 덕령부인 흥양이씨 만력정유 매왜적순절처 몰후 224년 경자)’
김덕령 장군은 1596년(선조 29년) 왕족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가담했다는 무고를 받고 한양으로 압송돼 조사를 받다 옥사했다. 서른의 나이였다. 흥양 이씨는 수레에 실려온 남편의 시신에 손수 지은 수의를 입혀 무등산 자락에 묻었다. 이씨는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다가 정유재란 때 친정 올케 등과 담양 추월산으로 피란을 갔다. 일본군이 이곳까지 추격하자 이씨는 보리암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순절했다. 남편이 옥사한 지 1년 만이었다. 1661년(현종 2년)에야 김덕령 장군은 억울함이 풀려 관작이 회복됐다.
 

왜군에 의해 보리암에서 죽임을 당한 김응회 의병장 모자와 순절한 김덕령 장군 부인의 올케들 추모비. [사진=황호택]

보리암에서 흥양 이씨와 함께 피란을 왔던 김응회(金應會) 의병장과 어머니 창녕 성씨도 순절했다. 왜적이 어머니를 칼로 내려 치려 하자 김 의병장이 몸으로 막다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김덕령 장군은 김 의병장의 처남. 흥양 이씨의 두 올케 완산 김씨와 제주 양씨도 보리암에서 이때 순절했다. 조정은 두 여인에게 숙부인(淑夫人) 작위를 내렸다. (《潭陽鄕校誌》 권7 정유재란 충장공 김덕령 장군부인, 담양향교 1997)

담양 추성관에 모인 6000여 의병

김 의병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남 김덕령 장군과 함께 담양 객사(추성관)에서 담양 회맹군 창의(倡義)에 참여했다. 창의란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날 추성관에 모인 의병 6000여 명은 고경명 장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김응회 공은 처남인 김 장군 부대에 합류해 활약했다. 1596년 김 장군이 이몽학의 난에 가담한 반역죄로 몰렸을 때 한양으로 함께 압송됐다. 그는 호된 곤장을 맞고도 굴하지 않고 “김 장군이 반역을 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고 대답했다. 심문 책임자인 김응남이 김 의병장의 태도에 감복해 ‘참다운 의사(義士)’라고 장계를 올리자 선조가 즉시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광해군은 김 의병장의 충효를 가상히 여겨 1613년 학동리에 효자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으며 담양군 수북면 구산사에 배향했다.
보리암 근처에 김 의병장의 순절처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었으나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훼손했다. 담양향교가 1996년 3월 이를 복원하고 추월산 들머리에 모자의 순절비를 세웠다. 미증유의 국난에 처했을 때 담양에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의병들이 이렇게 줄을 이었다. 담양이 의향(義鄕)이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고영진 홍영기(연구원) 《의향의 고장, 담양》 담양군, 2004
2.김정현(글쓴이) 《시간을 건너 그 길을 걷다》 담양군(펴낸이), 상상창작소 봄(펴낸 곳), 2019
3.임방규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 백산서당,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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