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80년대 읍이나 면 단위의 중심 지역엔 어김없이 양조장이 한두 개씩 있었다. 술을 빚어 도매로 넘기기도 하고 주전자를 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소매로 팔기도 했던 양조장. 20세기 우리 일상에서 양조장만큼 삶의 애환이 깃든 공간도 드물 것이다.
우리에게 양조장이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였다. 조선시대엔 집에서 술을 빚었으나 1909년 주세법, 1916년 주세령이 시행되면서 가양주(家釀酒)가 금지되었다. 모든 술은 허가받은 양조장에서만 생산해야 했고 집에서 술을 빚으면 불법 밀주(密酒)로 취급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양조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양조장의 등장은 일제 식민지정책의 산물이었지만 우리 일상에서 필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양조장은 그 지역의 상징이 되었고 양조장 집은 그 지역의 유지로 대접받았다.
담양읍에는 해동주조장이 있었다. 50여 년 동안 운영되다 2010년 폐업한 뒤 한동안 방치되었으나 지금은 문화예술공간 해동문화예술촌으로 다시 태어났다. 해동주조장의 역사는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담양중학교 인근에서 유류 판매업을 하던 조인훈은 선궁(仙宮)소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소주 판매가 활성화되자 그는 1966년경부터 양조 시설을 확충했다. 주변의 땅을 매입하고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그 무렵 소주 중독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러자 단속이 강화되었다. 전라남도 위생당국은 소주에 함유된 유해성분(에탄올)에 대해 점검을 했고 1968년 이 과정에서 선궁소주가 에탄올 함량 초과로 판매중지 처분을 받았다. 해동주조는 고민 끝에 소주를 포기하고 해동막걸리, 해동동동주로 주종을 바꾸었다.
그러나 막걸리 소비가 점차 줄어들었고 2003년 조인훈 대표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장남인 조영규 대표가 해동주조를 이어받았지만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서 2010년 4월 문을 닫고 말았다. 폐업 이후 해동주조장은 방치되었다. 해동주조장의 물품들은 여기저기 팔려나갔다. 담양의 대표적인 산업시설이자 담양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공간은 그렇게 문을 닫았다. 그때, 해동주조의 역사를 보여주는 물품들이 적잖이 사라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해동주조장 일대는 2019년 6월 복합문화공간인 해동문화예술촌으로 다시 태어났다. 담양군은 해동주조장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교회 건물과 옛 담양의원의 안채 건물을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곳은 역시 주조장 아카이브. 엣 주조장 건물의 천장 트러스 구조를 노출시킴으로써 근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살렸다. 해동주조장의 역사, 주조장의 산업적 문화적 의미와 가치, 막걸리 제조과정 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사업자 등록증과 장부 등의 서류, 선궁 소주의 병과 라벨, 해동막걸리 말통(곡식, 액체, 가루 따위를 한 말 분량으로 담을 수 있는 통)과 광고 현수막, 금고 등등 해동주조장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막걸리 양조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 술 익어가는 과정을 소리와 영상으로 재현한 공간도 있다.
근대 건축물 분위기가 아니라 새로 지은 유리 건물도 있다. 이곳은 해동식당 ‘치도’다. 청년창업 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멕시코 음식 전문점. 치도는 스페인어로 “매우 좋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식당에 들어서자 멕시코 음식 특유의 향이 코를 강하게 자극한다. 2층과 옥상에 올라가보니 해동문화예술촌의 여러 건물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유리 건물이 주변의 근대 건축물과 낯선 조화를 이뤄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 식당 덕분에 해동문화예술촌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해동주조장 맞은편에는 옛 담양의원의 안채 건물이 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람한 솟을대문. 원래 위치에서 약간 옆으로 옮겨 해동주조장의 입구와 마주보도록 했다. 위치를 옮기면서 기단부(받침)를 약간 높여 육중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대문에는 ‘추자혜’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추자혜(秋子兮)는 담양의 백제시대 때 지명. 대문 뒤쪽에는 큼지막한 한옥을 지어 담양군문화재단 사무실로 쓰고 있다. 마당에는 장독대와 연못을 만들고 이런저런 조형미술품을 설치해 놓았다. 양조장 건물과 마주보고 있는 한옥의 육중한 솟을대문. 그 낯선 만남이 신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후원=담양군(군수 최형식) 뉴파워프리즈마(회장 최대규)
참고문헌
1.국립민속박물관 《우리 술문화의 발효 공간, 양조장》, 2019
2.담양군․담양문화재단 《해동주조장 아카이브 - 간극의 기록》,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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