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울을 동북아 금융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 등 신흥 경제국의 추격으로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하락하는 가운데 서비스 산업, 특히 금융 산업을 획기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여의도를 뉴욕의 맨해튼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초대형 국제금융센터(IFC) 건설을 시작했고 그 외 규제 완화, 인프라 구축 등 다양한 방안을 내놓았다. 2012년까지 아시아 3대 금융 허브를 구축한다는 목표였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원대한 계획은 한낱 허황된 꿈으로 여겨진다. 전통적 아시아 금융 허브인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훨씬 뒤처진 가운데 상하이 등 신흥 금융 도시에도 밀리는 상황이다. 권위 있는 글로벌금융센터인덱스(GFCI)에 서울은 세계에서 13위, 아시아에서는 6위에 머물러 있다. 반면 1위 뉴욕, 2위 런던에 이어 홍콩은 3위, 싱가포르는 4위에 위치한다. 이는 그나마 개선된 순위이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은 30위권에서 맴돌았다.
금융 허브로서 서울이 힘을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금융 기관의 지방 이전이다. 서울의 경제 집중을 줄이고 지방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이 서울의 금융 기능을 키우기보다는 이를 지방 도시로 분산시켜 왔다. 한국거래소와 한국예탁결제원, 자산관리공사가 부산으로, 국민연금공단은 전주로 이전했다. 여기에 더해 이재명 대통령 후보는 영호남 남부 수도권을 건설해 금융 허브 기능을 더욱 분산하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권에서는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지방 이전까지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금융 허브 도시가 날로 그 몸집을 키우는 마당에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뉴욕이나 런던 등 대규모 금융도시와 경쟁하기 위해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도쿄 등 아시아 도시들은 집중적인 정부 지원 정책을 통해 금융 인프라를 강화하고 세제 혜택 등을 통해 외국 금융 기관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오히려 서울의 금융 기능을 줄이고자 노력한다. 거기에다 여전히 남아 있는 까다로운 규제, 경직된 노동시장, 높은 세금으로는 외국 금융 기관을 유치하기가 불가능하다. 다른 주요 금융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까다로운 외환관리법이 존재하고 영어 사용이 아직 불편한 것도 큰 장애 요인이다.
또한 외국 금융 기관 관점에서는 한국이 시장으로서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경쟁은 치열해지는 반면 금융 시장 규모는 제자리걸음인 것이다. 최근 미국의 씨티뱅크는 한국에서 소매 금융업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수익성 악화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많은 지역에서 단행되었지만 싱가포르 등 아직 잠재력이 있는 도시에서는 철수 움직임이 없다. 2013년 HSBC가 소매 금융 철수를 단행한 데 이은 이번 조치로 국제 금융 기관이 보는 한국 금융 시장의 매력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이 국제 금융도시로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의 앞선 IT 기술을 금융에 접목한다면 현재 각광받고 있는 핀테크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소개된 GFCI는 금융 허브가 유치할 수 있는 금융 기관을 여덟 종류로 나누는데 여기서 한국은 핀테크 분야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 투자 관리, 보험 등 기타 분야에서는 모두 10위권 밖에 위치하는 것을 볼 때 역시 한국이 기대할 수 있는 분야는 핀테크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중앙정부가 등한시하는 금융 허브 건설에 서울시가 앞장서고 있고 특히 핀테크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은 취임 후 의욕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30년까지 서울을 글로벌 5대 금융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외국 금융 기관 100개를 유치하고 연간 외국인 직접 투자 300억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얼마 전 서울투자청을 설립했고 이를 통해 핀테크 스타트업 회사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여의도 IFC 내에 핀테크 랩(Fintech Lab)을 구축했고 이를 이용해 현재 10여 개국 스타트업 100여 개를 유치했다. 새로 입주하는 핀테크 신생 회사들은 서울시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사무실 및 고용 지원, 법률 서비스 알선, 자금 조달 등이 포함된다. 서울시는 향후 5년간 2500억원을 지원해 자산관리, 금융투자, 크라우드펀딩, 블록체인 분야 스타트업을 유치해 육성할 계획이다.
또 한 가지 금융 허브로서 서울의 장래를 기대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최근 불안해지는 홍콩의 국내 상황이다. 중국이 엄격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이후 1997년 영국의 양도 이후 홍콩이 누려온 1국 2체제는 흔들리고 있고 여기에 불안을 느끼는 외국 기업들이 홍콩을 탈출하는 것이다. 미래 예측 가능성이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심하면 사유 재산 보호에 대한 우려까지 생기는 상황이다. 현재는 이 과실을 정치·경제적으로 보다 안정된 싱가포르가 대부분 취하고 있어 많은 다국적 회사들이 몰려가고 있으나 이 중 일부분을 서울이 유치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최근 국제적 언론사의 움직임에서 확인된다. 지난 몇 년간 서울은 아시아의 새로운 미디어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즉 국제적인 언론사들이 아시아 지역 본부를 홍콩이나 도쿄 혹은 베이징에서 서울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뉴욕타임스가 아시아 디지털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아울러 일부 지역 본부 기능을 홍콩에서 서울로 이전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서울 지국을 런던 등 국제적 도시와 맞먹는 지역 허브 도시로 격상했다. 이를 위해 인력을 확충하고 기타 설비를 보강하고 있다. 다른 서방 언론기관들도 서울 지국 확장을 검토 중이다.
그 이유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국가에 비해 한국이 더욱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언론 자유가 크게 개선되어 있고 정부 기관이나 기업도 언론에 보다 우호적인 것이 서울 이전 및 확장의 배경이었다고 이들 언론사는 전한다. 거기에다 도쿄, 홍콩 등 도시에 비해 아직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나 사무실 유지비도 그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고려할 때 서울을 금융 허브로 만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지금이라도 재개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곧 정부가 지향하는 양질의 일자리와도 연결되고 제조업 하락을 상쇄하는 서비스 산업의 발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한국이 자랑하는 IT와 고도로 교육되고 훈련된 인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이 동북아 금융허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선결조건이 따른다. 무엇보다 과도한 정부 규제 완화이다. 아직까지 금융당국은 포지티브 규제 정책을 고수하여 법률이나 정책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외국 금융 허브에서는 반대로 금지되지 않는 것은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주 52시간 근로제의 탄력적 운용 없이는 원활한 국제 금융 거래가 어렵다. 외환시장 육성도 요구된다. 현재 100억 달러 규모인 시장으로는 금융 중심지로 부상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법인세 등 조세 부담 완화가 필요하다. 또한 금융 지식이 해박하고 영어 구사가 자유로운 인재의 확보가 시급하다. 비영어권 국가 중 영어 구사력이 5위인 싱가포르에 비교해 한국은 30위로 처져 있다.
더욱 필요한 것은 정치권의 의지다. 특히 지방 균형 발전 논리에 매몰되어 기존 금융 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하려는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 금융 허브와 관련해 20여 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두 가지 상반된 정책을 추진했다. 한 가지는 동북아 금융 허브 건설이고 또 한 가지는 지방 균형 발전이다. 안타깝게 이 두 가지 정책은 병행이 어려워 상호 모순적이다. 이번 대선에 나서는 주요 후보들은 모두 노무현 대통령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두 정책이 동시에 성과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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