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전은 우크라이나의 압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이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44)은 "내게 필요한 건 (피신을 위한) 승용차가 아니라 실탄(I need ammunition, not a ride)"이라는 매우 간결하지만 함축적인 말로 미국의 국외 도피 권유를 뿌리쳤다. 러시아의 대대적인 공세 속에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남아 자국민들에게 결사 항전을 독려하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손에 든 휴대폰과 타고난 의사소통 능력일 것이다. CNN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각종 최근 행보를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er than the sword)'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속담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가 각종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셀피(selfie) 동영상은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연일 공습하는 러시아 전투기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개전 이틀째인 지난달 26일 새벽 카키색 반팔 티셔츠 차림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인적이 드문 키이우의 밤거리에서 측근들과 함께 서서 30초가량의 '인증 영상'을 휴대폰으로 찍어 올렸다. 자신이 폴란드 국경 인근 도시로 이미 도주했다는 러시아 언론의 허위 '역정보'를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이후 자신의 대국민 메시지와 동영상을 SNS에 계속 올리며 국민들의 항전을 독려하거나 러시아 침공의 부당성을 알리며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이달 초에는 그가 영국 하원의 화상연설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영국이 나치 독일에 맞선 2차 세계대전에 비유했다. 그는 1940년 6월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사용했던 문구를 빌려 "우리는 숲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개전 3주째인 지난 16일에는 화상연설을 통해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2001년 9·11 테러 같은 악몽을 겪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단지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는 게 아니고 "유럽과 세계의 가치, 미래를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설 중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모습,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는 모습, 아이와 여성이 울부짖고 희생자들을 땅에 던지듯 묻는 모습 등 참혹한 광경이 담긴 1분30초가량의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를 세기의 명연설가로 꼽히는 프랭크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나 마틴 루서 킹 목사와 견주기도 한다. 즉, 간결하지만 인상적인 은유(metaphor)와 강력한 이미지(imagery)의 단어 조합을 사용하면서 상대방에게 깊은 감동과 호소력을 더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개적으로 러시아군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당신들이 우릴 공격하면 당신들은 우리의 등이 아니라 얼굴을 볼 것(When you attack us, you will see our faces, not our backs)"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세계 각국은 도심으로 진입하려는 러시아 탱크를 화염병과 소총으로, 때로는 맨몸으로 막아선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애국심과 용기에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특히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외부 세계로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 전달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글로벌 청년층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의 모습은 보안을 우려해 휴대전화는 물론 디지털 기기를 일절 쓰지 않는 러시아의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대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적어도 미디어 홍보전에서는 러시아에 이미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푸틴은 젤렌스키의 대활약(?)에 신경이 크게 거슬렸는지 자신만의 특유의 방법으로 홍보전에 나섰다. 대규모 관중 동원을 통한 야외 대중 연설이다. 지난 18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름반도(크림반도) 병합 8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그동안 즐겨 입던 딱딱한 정장차림을 포기했다. 그는 양복 대신 제품 가격이 1600만원이나 된다는 이탈리아 브랜드 '로로피아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서방 언론은 이를 경제 제재로 고통받는 러시아 국민을 외면하는 처사라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리고 줄곧 간편한 일상복 차림으로 동영상에 등장하며 일반 국민을 독려하는 젤렌스키의 모습을 대비시켰다.
선(善) vs 악(惡)의 대결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무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뛰어난 소통 능력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특별한 재능이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고 있지만 앞으로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민주주의 가치 그리고 평화와 안보를 수호할 수 있을지는 훗날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어쨌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마치 선(善) vs 악(惡)의 대결이라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가 국제 여론전에서 수세에 몰리면 몰릴수록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속국으로 만들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東進)을 분쇄하려는 푸틴의 야심은 꺾일 수밖에 없다. 이미 우크라이나인들의 애국심과 투쟁심에 고무된 서방의 많은 국가들이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 동참하거나 대공 미사일 등 군사장비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무리하게 핵무기나 생화학무기 공격 카드를 사용한다면 사태는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어린이와 임신부가 포함된 민간인에 대한 러시이군의 비인간적 공격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을 '전범' 또는 '살인 독재자' '폭력배'라고 공개적으로 칭하며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반전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코너에 몰린 푸틴이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는 예측 불허다.
객관적 전력상 러시아의 손쉬운 승리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던 전쟁의 결말은 아직 안갯속이다. 유엔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인구의 25%인 약 1000만명이 국내외로 피란을 떠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와 곡물 가격 폭등은 물론 새로운 난민위기로 유럽 경제는 큰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피해자는 그동안 러시아와 서구의 패권 전쟁에서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는 우크라이나 자체일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독립된 나라다. 반러 세력과 친러 세력이 서로 비등해서 지난 30여 년간 분위기에 따라 친러파 또는 친서방파 지도자가 탄생하곤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강력히 주장하던 친서방 지도자다.
젤렌스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실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2019년 4월 우크라이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정치 경력이 전무한 41세의 '코미디언' 출신인 젤렌스키 후보의 승리는 의외의 선택으로 보였다. 그는 73.2% 득표로 재선을 노리던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했다. 억만장자 사업가 출신이자 정치적 경력도 화려한 포로셴코는 친러파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된 뒤 5년 동안 친서방 정부를 이끌었지만 만연하는 정경유착의 부정부패 의혹으로 국민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우크라이나가 '국민의 종'이라는 TV 드라마에서 소시민이자 고등학교 역사교사가 대통령으로 변신해 부패의 검은 고리를 깨부수는 청렴한 정치인 연기로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배우를 압도적인 표차로 선택한 것을 보면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환멸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가 다분했지만 당시 세계 언론은 유럽의 변방 국가인 우크라이나의 정치 상황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말부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병력을 증강하며 침공 위협을 고조시키자 군사적 대응은 제쳐놓고 경제 제재 옵션만 고집했다. 미국의 군사 개입이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전쟁위기가 고조될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대내외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그는 미국의 러시아 침공 임박 경고를 두고 그러한 위협이 과장되었다고 반박했다. 또 러시아가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에 대해서도 엇갈린 메시지를 내놓는가 하면 외교·국방을 다루는 요직에 전문성이 부족한 측근을 배치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공 이후 러시아 특수부대원의 암살 위협도 무릅쓰고 수도에 남아 우크라이나의 필사적 항쟁을 이끄는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바뀐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인기 만점인 그의 SNS 메시지와 동영상 연설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대국민 라디오 담화, 즉 '노변정담(fireside chat)'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루스벨트는 30여 차례 노변정담으로 국민들과 늘 함께했다.
젤렌스키가 전 세계에 보내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렇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되찾은 소중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악의 무리'와 대결을 결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자신들의 피와 생명을 담보로 민주주의 금자탑을 세우고 있는 모습은 훗날 역사에 위대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놀라운 투쟁이 개전 초반 러시아군의 예봉을 꺾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한다 해도 너무나도 끔찍한 전쟁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중립화' 등 여러 가지 방안으로 서구와 러시아 간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큰 게 사실이다. 즉,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와 같은 '약소국' 지도자에게 특히 요구되는 능력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패권 놀음에 이용(?)당해 온 나라가 무시무시한 전쟁터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먼 훗날 그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인 평가가 궁금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 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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