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외교는 자기에게 유리한 패를 늘리는 게임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호주, 미얀마 대사)
입력 2022-03-31 17:42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세계가 새로운 냉전시대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뮌헨 안보회의에서 ‘NATO 확장은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체제를 없애고 러시아를 포함한 다극체제, 즉 여러 강대국들이 대등한 파워 게임을 벌이는 세계를 구축하겠다’고 발언하였다. 푸틴은 지금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하여 우크라이나 침략이라는 무리수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푸틴의 말처럼 단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그 질서가 빠르게 변해가는 대전환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이러한 대전환 시대에는 예측 불가한 상황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우리는 외교.안보 행보를 더욱 조심스럽게 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번 잘못 들어서면 나중에 이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길도 많을 것이고 갑자기 빠지게 되는 함정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힘으로 주도하던 시대, 즉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였던 지난 70여 년 동안 구냉전의 양극체제에서는 물론 냉전 붕괴 후 짧았던 단극체제에서도 자유진영 국가들은 미국과 행보를 같이하는 것이 안전한 길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세계는 미국이 과거처럼 힘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질서를 지켜나가기 힘들게 되면서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다. 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도전자, 즉 중국과 러시아라는 권위주의 국가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이제 혼자서 지금의 질서를 변경하려는 이 두 국가를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판단하에 동맹국, 서방국들을 규합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국가가 미국과 행보를 같이한다고 방향을 정하면 미국이 상대하는 권위주의 진영국가들과 거친 몸싸움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맞는 일이요 국익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 양 진영 간 본격적인 대결구도가 완성되지도 않았고 그 지점으로 가는 과정도 길고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당장 우리의 방향을 잡는 것보다는 당분간은 요동치는 주변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우리가 주요국을 상대할 수 있는 외교의 패를 늘려 가는 데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외교라는 게임의 룰에서는 기본적으로 상대와의 게임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패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편이 아쉬워하는 유리한 패를 우리가 갖고 있거나 상대편이 무서워하는 패를 우리가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게임에서 유리해진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비대칭 전력, 전략적 수단을 많이 확보해서 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 우리와 손잡을 때 우리와 손잡은 상대국의 취약한 부분을 많이 메꿀 수 있는 전략적 수단일수록 더 유리하다. 그리고 우리의 방어망을 더욱 튼튼히 하여 우리가 상대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와 연대를 할 수 있는 다른 나라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우리 혼자서는 견뎌내기 힘든 경우를 대비해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동맹이나 안보협력국을 많이 만들어야 상대가 우리를 쉽게 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기술, 특히 첨단분야에서 초격차 기술을 많이 개발하여 우리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많아져야 한다.
 
이렇게 패를 많이 확보한 이후에도 우리의 패를 너무 미리 보여주거나 내흔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패들이 있다는 점을 수시로 암시는 하되 상황의 변화를 보아가며 필요한 때에 맞춰 차례로 내보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지혜롭게 게임에 임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 패를 너무 빨리 보이거나 꺼내 들면 처음에는 좀 효과가 있지만 상대방의 대응조치를 유도하여 그 효과가 곧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곧 또 다른 패를 다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성급한 패 보이기는 금물이다. 가급적 우리의 패를 상대가 짐작은 하되 정확히 알지 못하게 하고 또한 이 패를 사용할지 여부를 불투명하게 해야 한다. 이럴 때 상대는 우리의 패를 더 알려고 하고 우리가 혹여나 그 패를 사용할까 봐 우리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역대 정부는 우리 패를 더 만들 생각을 하기는커녕 우리가 가진 패를 스스로 버리는 우를 범했다. 순서대로 짚어보면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말에 독도를 대통령이 직접 방문함으로써 우리가 쓸 수 있는 최고의 패를 먼저 다 써버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뒤로 일본은 독도에 대한 공세를 높이고 지자체 수준에서 하던 독도 관련 행사를 중앙정부 차원에서 차관이 참가하는 행사로 격상시켰다. 그래서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무력을 동원하는 방법 외에 더 이상 강수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국의 전승 기념식에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함께 직접 올라갔다. 이로써 중국에게 한국이 미·중간 줄타기에서 중국에 가까운 위치로 이동하였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우리의 패를 엉뚱하게 써버린 셈이다. 그런 후 한국에 미국의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갑자기 배치하는 바람에 중국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역시 사드와 관련하여 중국에게 소위 3불 정책, 즉 사드 추가배치를 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제에도 참여하지 않고, 한·미·일 안보협력을 하지 않겠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 정책적 입장 발표이지 중국에 약속한 것이 아니라고 현 정부는 설명한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한국이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패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곧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새 정부를 테스트 하기 위한 외교.안보적 획책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가 전략적으로 지나치게 선명성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패를 줄이고 외교적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일이 될 수 있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전략적 의도는 분명히 하되 이를 너무 뚜렷이 상대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3불 정책 폐지 자체가 상당히 묵직한 패인데 이를 단번에 써버리면 상대국도 이에 대응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기에 외교관계가 힘들어질 것이다. 오히려 이 패를 사용할 가능성을 계속 보이면서 상대국과의 게임에 이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조치를 가능한 한 많이 받아내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더 이상 버티면 외교적 효용보다 비용이 역으로 증가한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패를 보이거나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보통 카드게임에서도 자기가 가진 강력한 패는 가급적 늦게 보여주면서 게임의 방향 전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나가는 사람이 고수이다. 외교협상에서도 자신의 협상목표를 먼저 밝히지 않고 항상 상대의 목표수준을 미리 알아내려는 심리게임이 일반적으로 벌어진다. 이 게임에서 이기는 쪽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다극체제 속 외교게임에서 신정부가 우리에게 유리한 패를 많이 만들고 이 패를 현명하게 사용하여 우리의 전략적 지위를 유리한 곳에 올려놓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