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던져보는 질문. 사회와 경제도 양이 쌓이면 구조적으로 질도 바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자.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보릿고개의 기억을 뒤로하고 60여 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 경제. 경제의 덩치(국내총생산)는 1960년 19억8000만 달러에서 지난해에는 1조7978억 달러로 무려 904배나 커졌다. 1인당 국민총소득도 같은 기간에 438배나 늘어나 3만5000달러를 넘어섰다. 한국 경제는 이제 세계 10위 수준으로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우리나라는 1996년에 선진국 경제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는데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는 지난해가 돼서야 한국이 소속된 그룹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바꿨다. 선진국 인증을 받은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바라본 한국 사회와 경제의 자화상은 어떤가? 양적 도약 못지않게 선진국으로 불릴 만큼 명실상부하게 질적 제고도 이뤘는가? 자신이 있게 ‘그렇다’라고 답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은 여전히 양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다. ‘1인당 소득을 5만 달러로 늘리자’ ‘경제 규모 순위를 더 올려보자’는 식의 양적 목표가 더 눈에 띄는 분위기다. 오랜 시간을 추격과 추월에 익숙해진 상태여서 그 관행적 사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하다. 이미 세계 10위인데 추월을 하면 얼마나 더하겠는가?
이젠 ‘경제와 사회도 양이 쌓이면 늘 질이 바뀌는가?’에 대해 답을 해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양을 늘린다고 해서 질적 향상이 자동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질적 ‘소프트 파워’의 혁신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멀리 내다보고 본질을 꿰뚫어 보는 정책적 리더십과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공감대가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성숙한 사회만이 실현해낼 수 있는 과제다.
특히 우리는 지금 성장의 지향점이 크게 변화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성장의 속도만을 올리는 관행은 기후변화 대응, 환경 보호 등 이슈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제동이 걸리고 있다. 미래 세대가 사용할 자원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성장을 하자는 지속 가능 발전이 글로벌 화두로 제기돼 있는 상태다. 시대적 이슈로 떠오른 ESG(환경·사회·지배구조)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도 모두 이 맥락에서 논의와 실행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국회 미래연구원이 2020년에 53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미래 가치관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10명 중 7명(68.2%)이 ‘자연환경 보존이 도시 개발보다 중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보다 환경을 지키는 일을 우선시하고 있다. 한국행정학회의 조사도 같은 결과를 보이고 있다. 응답자 50.8%는 ‘자연보호와 녹지 보존을 위해 경제 개발을 늦추거나 포기해야 한다’에 동의하고 있다. 또 ‘소득이 적고 출세하지 못하더라도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응답 비율도 45.3%에 이르고 있다. ‘다소 바쁘고 피곤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고 싶다’는 응답자는 28.5%에 불과하다. 국회의장 직속 국가중장기어젠다위원회는 최근 ‘미래비전 2037’을 내놓으면서 “국민들은 사회적 가치와 환경적 가치의 중시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기존 경제성장과는 다른 사회적 방향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삶의 질, 더불어 사는 공동체, 질적 성장, 녹색 전환 등을 추구하는 성숙 사회로의 전환을 이 위원회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귀담아들어야 할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동안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국내총생산(GDP)이 제대로 된 성장을 반영하는 지표인지에 대해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GDP는 계속 늘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 사람들 삶은 팍팍해지고 있다거나 국민의 행복도와 거리감이 크다는 지적은 GDP가 갖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2008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으로 구성된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 8인 위원회는 2010년에 ‘GDP는 틀렸다’는 보고서를 출간했다. 이 보고서에서 이들은 GDP는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국민의 행복을 측정하는 데 문제점을 드러냈다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생산보다 가계 입장에서 소득과 소비를 측정하고 재산, 불평등, 삶의 질 등을 같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의는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LAB2050은 개인이 얼마나 소비했는지에 방점을 두고 지속 가능한 경제 후생과 사회경제 발전을 측정하기 위해 개발된 ‘참성장지표(GPI)’를 GDP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GPI는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와 버몬트주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에 앞서 부탄은 1998년부터 국민의 심리적 안정, 건강, 문화적 다양성 등 9개 영역을 포괄하는 국민총행복(GNH)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한국 정부도 국민 삶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는 지표 개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생산 통계인 GDP의 지속적 사용이 당분간 불가피하다면 GPI나 GNH 같은 지표를 보조지표로 써서 성장의 질적 측면과 개인의 행복도 들여다봐야 한다. 측정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 사회의 민낯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낙제점인 행복과 사회적 자본의 문제이다. 최근 공표된 ‘2022년 세계 행복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59위에 그치고 있다. 대만(26위), 일본(54위)보다 낮은 순위다. 그나마 이것도 1인당 소득과 평균 수명이 양호한 덕분이다. ‘어려울 때 의지할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지’를 물어본 사회적 지지의 랭킹은 85위, 또 ‘어제 웃거나 즐거운 일이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긍정적 영향은 117위로 하위권이다.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사회적 자본은 어떤가?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인 신뢰 수준을 보면 지인과 모르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각각 OECD 16개 회원국 중 10위로 낮은 순위를 보이고 있다. 경제 규모의 양과 삶의 질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며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며 문화와 행복을 강조했다. 크기, 넓이, 높이 등 양적 기준을 중시해온 한국 사회. 세계가 놀랄 만한 성취를 이뤘지만 놓치고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이제 국가에서 개인 삶의 질로 눈을 돌려 양질 전환의 궤도 수정을 해야 할 때다. 영국이 국민의 외로움 문제를 다룰 고독부를 신설한 것처럼 5월에 출범하는 새 정부가 ‘국민행복부’를 출범시켜 본격적으로 ‘아름다운 대한민국 만들기’에 나서보면 어떨까.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