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온전하게 제 소임을 다해야 한다. 권력에 예속되거나 그와 야합하는 검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요체야말로 바른 세상을 이루어나가는 데 으뜸가는 필수조건이다. 그래야 '그들만의 나라'를 '우리 모두의 나라'로 격상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 산민 한승헌 책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中
'우리 모두의 나라'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면서 동시에, 동백림 간첩단 사건·통일혁명당 사건·민청학련 사건 등 100건이 넘는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행동파였던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1934~2022)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고이 간직한 채 4월 20일 저녁 9시경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향년 88세.
고인은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현재의 사법고시) 8회에 합격한 뒤 법무관을 거쳐 서울지검·법무부 등에서 근무하다 1965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분지>(糞地)라는 책을 써 반공법 위반으로 처음 기소된 작가 사건, 이른바 '분지 필화사건'(1965)을 시작으로 그의 50여 년 인권 변호 활동은 시작됐다.
이후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민청학련 사건(1974), 1·2차 인혁당 사건(1964·1974) 등 군부독재 아래 엄혹했던 시기, 탄압받는 양심수와 시국사범을 앞장서서 변호했다. 한 변호사는 생전 자신이 변호한 시국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만 해도 180명인 '민청학련 사건'을 꼽았다. "당시 학생과 젊은이들을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며 잡아갔는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그가 생전에 한 말이다.
긴급조치 시대상을 풍자한 '정찰제 판결'이란 그의 어록은 널리 회자됐다. 군 검찰이 기소하고 구형을 하면 바로 다음날 군법회의에서 그대로 같은 형량이 선고되는 현실을 두고 그는 "한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이 아닌 삼각지 군법회의에서 확립됐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실제 군 검찰이 15년형을 구형하면 군법회의는 15년형을 선고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한 변호사는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며 '어떤 조사(弔辭)'라는 제목의 수필을 신문에 발표하고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잠을 재우지 않는 가혹행위와 거짓진술을 강요받으며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변호인석이 아닌 피고인석에 서게 된 것이다.
10개월 가까이 옥살이를 한 뒤 항소심에서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징역형을 경험한 그는 생전 "그럴 만한 죄를 짓고 잡혀갔으면 괜찮은데, 억울한 사람들 변호하면서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발언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탄압을 받으니까 참 억울했다"며 "그러나 역사의 큰 장을 놓고 보면 그때는 모두가 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희생을 감수하던 시기였으니, 그 측에 끼게 된 것이 결코 불행한 일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해당 사건은 재심 끝에 2017년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는 그에게 취재진이 소회를 물었다. 그는 자신보다 타인 그리고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는 게 드러났다. 고인은 "기쁨보다는 착잡함이 더 크다. 아직도 저처럼 정치 탄압의 대상으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분들이 많은데 앞으로 어떤 독재 권력도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고인은 제도권에서 줄곧 '우리 모두의 나라'를 꿈꾸며 국민에 의한 사법 기틀 마련에 헌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창립도 주도했고,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17대 감사원장으로 임명돼 이듬해 정년퇴임하기까지 공직사회 부패척결에 힘썼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법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아 사법제도 개혁에 앞장섰다. '국민에 의한 사법'을 강조하며 배심제도 도입에도 앞장섰다.
그는 한국기자협회 법률고문과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관훈클럽 고문변호사 등도 역임했다. 고인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하고 사법개혁과 사법부의 탈권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한편, 그는 첫 시집 <인간귀향>, 두 번째 시집 <노숙>, 세 번째 시집 <하얀 목소리>와 자신이 맡았던 시국사건들을 술회한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에세이 모음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 등 총 40여건의 도서를 펴냈다.
한국 법조계의 산 증인인 한 변호사는 평생에 걸쳐 강연하고 발표한 글을 엮은 산문집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통해 "당초에 법은 지배자의 의사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법치주의는 지배자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지배자인 국민의 권리 보장을 주안으로 삼는 사상으로 정립됐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강직한 삶이 어떤 소신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우리 모두의 나라'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면서 동시에, 동백림 간첩단 사건·통일혁명당 사건·민청학련 사건 등 100건이 넘는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행동파였던 '1세대 인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1934~2022)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고이 간직한 채 4월 20일 저녁 9시경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향년 88세.
이후 동백림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민청학련 사건(1974), 1·2차 인혁당 사건(1964·1974) 등 군부독재 아래 엄혹했던 시기, 탄압받는 양심수와 시국사범을 앞장서서 변호했다. 한 변호사는 생전 자신이 변호한 시국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만 해도 180명인 '민청학련 사건'을 꼽았다. "당시 학생과 젊은이들을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며 잡아갔는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그가 생전에 한 말이다.
해당 사건은 재심 끝에 2017년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재심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는 그에게 취재진이 소회를 물었다. 그는 자신보다 타인 그리고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는 게 드러났다. 고인은 "기쁨보다는 착잡함이 더 크다. 아직도 저처럼 정치 탄압의 대상으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분들이 많은데 앞으로 어떤 독재 권력도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고인은 제도권에서 줄곧 '우리 모두의 나라'를 꿈꾸며 국민에 의한 사법 기틀 마련에 헌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창립도 주도했고,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17대 감사원장으로 임명돼 이듬해 정년퇴임하기까지 공직사회 부패척결에 힘썼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사법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아 사법제도 개혁에 앞장섰다. '국민에 의한 사법'을 강조하며 배심제도 도입에도 앞장섰다.
그는 한국기자협회 법률고문과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 관훈클럽 고문변호사 등도 역임했다. 고인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하고 사법개혁과 사법부의 탈권위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한편, 그는 첫 시집 <인간귀향>, 두 번째 시집 <노숙>, 세 번째 시집 <하얀 목소리>와 자신이 맡았던 시국사건들을 술회한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에세이 모음집 <피고인이 된 변호사> 등 총 40여건의 도서를 펴냈다.
한국 법조계의 산 증인인 한 변호사는 평생에 걸쳐 강연하고 발표한 글을 엮은 산문집 <법치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통해 "당초에 법은 지배자의 의사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법치주의는 지배자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지배자인 국민의 권리 보장을 주안으로 삼는 사상으로 정립됐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강직한 삶이 어떤 소신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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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루 빨리 검찰정상화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