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불신의 시대'에 소개하는 “RBG” 스토리
현재 일본 출판만화 중 최고 인기 작품 중 하나인 하라 야스히사의 '킹덤'은 진시황의 전국시대 통일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각자 수백 년 역사를 가진 7개의 개별 왕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패배자의 원한과 증오가 발생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담판을 지으러 온 적국의 재상에게 훗날 시황제로 불리게 될 진나라 왕 영정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왕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법가의 구상이 싹튼 건 수천 년 전이지만 이후 역사에서 신정이나 왕정을 넘어 ‘법치’, 즉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가 확립된 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근대적 민주주의 출발인 프랑스 혁명 직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서부터 삼권분립이란 개념이 출발한다. 이후 현대 사회에서 (명목일지언정) 대부분은 이 원칙을 도입한다. 한국도 국가의전서열에서 대통령, 국회의장에 이어 공동 3번으로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이 국무총리 앞에 자리한다.
하지만 삼권분립의 일각인 사법부가 현재 사회적으로 받는 불신은 만만치 않다. 이런 사법 불신은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위협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미 1980년대를 풍미한 탈주범 지강헌 사건 당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고(영화 '홀리데이'가 해당 사건을 다뤘다), ‘판사 석궁테러 사건’으로 알려진 모 대학 교수의 재임용 소송 패소 관련 건은 역시 '부러진 화살'이란 영화로 반향을 일으켰다. 민주주의와 법치의 보루여야 할 사법 제도가 불합리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저변의 인식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극심한 사회갈등 가운데 2017년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의 경우 사회적 논란을 잠재우는 전환점으로 인정될 만하다. 한국 사회의 양보 없는 극한 대립 속에서 헌법의 가치와 질서를 수호하는 최후 보루의 하나로 헌법재판소의 존재감은 나날이 커지는 중이고, 주요 판결은 논쟁의 종결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종종 비교되는 미 연방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우리 경우로 치면 대법원 + 헌법재판소 기능이 통합된 셈이다. 일단 한번 임명되면 자신이 그만두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종신 지위가 보장되는 자리다. (중대한 범죄 사실이 확인되면 사임 가능) 변호사가 동네마다 있고 소송이 넘쳐나는 미국에서 사회적 논쟁의 최종 판정자로서 연방대법관의 존재감은 실로 엄청나다.
이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Justice’일 정도다. 이 9명의 정의 수호자들의 결정은 미국 사회를 들었다 놨다 하는 무게감을 지닌다. 국론분열과 시스템 파괴를 불러올 수 있는 민감한 쟁점들을 사회 통합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조율하고 타협해 미국의 미래 방향을 규정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연방대법원 판결은 ‘고도의 정치적 판결’이라는 비판도 듣는다. 지나치게 찬반 양측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도의 조정 과정은 나날이 포퓰리즘과 극단주의 위협에 노출되는 현대사회에서 필수적 기능일 것이다.
양당제 하의 미국 정치지형에서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때문에 해당 시기 집권 세력과 코드가 맞는 법조인이 대법관이 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종신제인지라 ‘고도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거의 항상 보수와 진보가 4:4 세력균형을 이루고 대법원장이 캐스팅 보트를 맡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연방대법관 인준 과정은 미국 정치에서도 가장 치열한 각축으로 통한다.
그런데 ‘RBG’는 2030대 젊은 세대에게도 높은 명성과 인기를 누리는 이례적인 존재였다. 그의 전기 다큐멘터리로 별세 직전 선보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는 주인공의 미국 사회 내 위상과 입지를 선보이며 시작해 연방대법관이 되기까지 수많은 진보적 판결을 이끈 내력과 대법관이 된 이후 미연방대법원 내부 지형을 한가득 소개한다.
전반부 대법관 이전 생애 부분은 여성이자 유대계인 비주류 법조인이던 ‘RBG’가 1960년대 학창시절부터 겪어온 법조계 내 성차별과 보수적 관행에 시달리면서 어떻게 사회 참여에 나섰는지를 주로 소개한다. ‘SEX’ 대신 ‘GENDER’ 용어를 성적 차이 구분에 도입하는데 역사적 판결들을 이끌어낸 활약상은 영웅적 법조인을 뛰어넘어 미국사회 변화의 척도로 직결된다.
‘RBG’는 미국 사회 내 극단주의 세력들의 반대로 표류하던 사안 해결을 위해 ‘선봉’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거나 동성결혼 합법화에 진력했지만, 편부가정의 보육수당 신청 소송 등도 맡아 진정한 양성평등 옹호를 구현하는 데 노력한다.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후 동료 대법관들과 함께 수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과격파’ 면모로 대중에게 각인되기도 했지만 ‘RBG’는 사회적 대립이 극명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합의를 중시하는 판결을 넘어, ‘나는 반대한다!’는 소신을 피력해 본인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과 상징성을 적절히 구사하는 독보적 능력을 선보였다. 보수적 법철학을 가진 이들에겐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비춰질 면모지만 대륙법 체계 중심인 한국과 달리 판례 변화에 따라 법적용이 변화하는 영미법 하에서 영화 속 주요 재판 결정 내용은 그 자체로 미국 현대사를 압축해놓는다.
조금만 입장이 다르면 원수가 되는 극단적 분위기가 팽배한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본받아야 할 모범적 사례다. 둘의 관계가 주로 언급되지만, 미연방대법관 중 상당수는 정치적 입장과 별개로 균형감을 중시한다. 정치적으로 판결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정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가능한 전원 합의를 선호하고, 진보와 보수 세력비가 기울어져 있다면 의도적으로 특정사안에 대해선 평소 입장을 넘어 균형감각을 고민한다.
개별 대법관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용광로 같은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사법기관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삼권분립이 무색하게 행정부 권력에 휘둘리거나 기득권에 유리한 판결 논란을 양산하는 근래 한국 사법부에 대한 색안경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P.S. 추가로 ‘RBG’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극영화로 대법관 이전 시절을 다룬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 그리고 국내 출간서적으로 '노터리어스 RBG -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과 시대(글항아리 출판)', '긴즈버그의 말 - 평등을 향해 걸어온 대법관의 목소리(마음산책 출판)' 등이 영화의 참고자료로 유용하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RBG
2018|미국|다큐멘터리|2019.03.28 개봉|98분|전체관람가
(감독) 벳시 웨스트, 줄리 코헨
(주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입 및 배급 영화사 진진
2018 90회 미국비평가협회상 다큐상
2019 MTV 영화&TV상 최고의 리얼 라이프 히어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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