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실력을 보여줄 첫 실험대는 20일 방한하는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다. 불과 취임 열흘 뒤에 이뤄지는 한·미 정상회담은 윤 대통령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새 정부는 외교 비전을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국가 실현‘이라고 선언한 터라 그 내용을 어떻게 드러낼는지가 나라 안팎의 최대 주목거리다. 윤 정부가 내세운 중추국가론은 북한 핵·미사일 위협뿐 아니라 미·중 전략경쟁, 우크라이나 사태 등 복합 과제를 앞에 두고 기존의 한반도 중심 외교를 넘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야심찬 구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20일 윤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22~24일 일본에서 미·일 정상회담과 쿼드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그의 이번 순방은 대중 압박 행보로서 이에 대응하는 윤 정부에는 외교적 디테일이 요구된다.
여기서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정부의 대미 경제안보외교다. 일본 정부는 바이든 대통령의 방일에 앞서 주요 각료들이 방미해 양국 경제안보체제 강화를 위한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협력방침을 마련했다.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내용들을 정리해 보자.
일본 경제산업성과 미국 연방에너지부는 지난 4일 탈탄소와 에너지 안전보장의 양립으로 연결되는 8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협의체인 '미·일 클린에너지 안보 이니셔티브'를 설치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의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도 화석연료 이용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이유다. 신재생 에너지나 수소, 원자력이라고 하는 클린 에너지로의 전환도 서두르기로 했다.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경제산업상과 제니퍼 그랜홈 에너지부 장관의 4일 회담에서다. 8개 분야는 신재생 에너지나 수소·암모니아의 보급, 원자력, 배터리 등 양국의 관련 국장급에 의한 전체 회의체를 설치하는 한편 그 아래에 8개 과장급 태스크포스를 두고, 분야별 목표와 달성을 향한 로드맵을 공동 작성키로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신재생 에너지 기술 분야에서는 태양광 발전의 신기술 등에 대한 연구개발 지원을 목표로 한다. 원자력에서는 소형 모듈로(SMR)와 고속로 등 첨단 원전을 아시아와 동유럽 등 제3국이 도입토록 협력하자는 내용도 들어있다.
미국과 일본은 이산화탄소(CO₂)의 회수와 재이용, 태워도 CO₂가 나오지 않는 수소와 암모니아에 대해 양국 기업의 협력을 지지하는 각서도 교환했다. 기존 각서는 국장급이었지만 장관급 서명으로 격상하고 협력 분야도 넓힌다고 한다. 미국은 비료용 암모니아를 생산하고 있고, 일본은 연료용 암모니아를 생산하고 있어 양국의 생산 확대와 공급망 구축을 꾀하기로 했다.
일본이 2021년 수입한 화석연료에서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원유 4%, 액화천연가스(LNG) 9%, 석탄 11%에 달한다. 자원국인 미국은 러시아산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지만 고유가에 따른 휘발유 가격 인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앞서 미·일 양국 정부는 최첨단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협력하기로 했다. 하기우다 경제산업상이 지난 2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과 반도체 분야 협력 추진을 위한 문서를 공표했다. 반도체 첨단 분야의 실용화와 양산을 염두에 둔 협력이 골자로 현재의 최첨단보다 두 세대 앞선 2나노(나노는 10억분의 1) 수준 이후의 기술, 미국 인텔이 가지는 ‘칩 렛’ 방식이 후보가 된다. 회로선폭이 2나노미터(nm)보다 앞선 첨단 분야에서의 협력, 중국을 염두에 둔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프레임워크 마련에 합의했다. 미·중 갈등을 배경으로 반도체는 경제안보상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대만 등 일부 국가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일 협력을 강화키로 한 것이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기업 자체의 경쟁력은 떨어졌지만 반도체 제조장비에 더해 실리콘 웨이퍼와 회로형성에 사용하는 레지스트(감광제), 반도체 표면의 연마제 같은 요소기술에서는 강점을 갖고 있다.
대만 TSMC의 개발과 양산 준비에 선행하는 2나노급은 미국 IBM도 2021년에 시제품 제작에 성공했다. 일본에서 산업기술종합연구소는 도쿄 일렉트론과 캐논 등 장비 메이커가 첨단 라인 전용의 제조 기술을 개발했다. 미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소재의 강점을 살려 안정적으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 조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는 전략이다.
일본 정부는 국내 생산 강화를 위해 TSMC의 공장을 규슈에 유치했지만 회로선폭이 10~20nm로 성능이 떨어진다. 첨단제품을 겨냥한 이번 협력은 TSMC 유치 이후 다음 단계의 전략이다. 대만과 한국 기업을 2나노 제품에서 따라잡고, 고성능 제품개발에서 앞서겠다는 목표다. 또한 따로 제조한 반도체 칩을 하나의 기판상에서 블록처럼 접속하여 만드는 ‘칩 렛’ 은 고객이 원하는 제품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90년께 50조원 정도에 이르는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500조원 규모로 불어난 시장에서 10% 정도의 점유율에 그치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등에 사용되는 연산 반도체가 과제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미·중 대립을 배경으로 국제적인 수평 분업 모델이 재검토되고 있어 반도체의 안정 조달이 양국의 현안이 되고 있다. 미국도 반도체 성능을 결정하는 회로선폭 미세화에서 인텔이 TSMC 등에 뒤지고 있다.
하기우다 경제산업상은 지난 3일 미·일이 협력해 최첨단 반도체 연구개발에 나설 뜻을 밝혔다. 뉴욕주 올바니에 있는 반도체 연구시설을 시찰하면서 미국 IBM 간부들과 논의했다. 그가 시찰한 올바니 나노테크 콤플렉스는 산관학이 최첨단 반도체 연구개발에 나서는 거점이다. IBM 외에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도쿄 일렉트론 등의 미·일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지금까지 뉴욕주와 기업이 150억 달러(약 20조원) 이상을 들여 거점을 구축해 왔다. 그는 IBM 간부들과의 의견교환에서 “양자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을 뒷받침하는 차세대 반도체의 기술을 유력국가에서 개발해 실용화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첨단 영역의 연구개발, 제조 능력을 확립하기 위해 동맹국인 미국과 일본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일체가 되어 추진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1980~90년대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에서 치열하게 대립했던 역사가 있다. 최근 들어 미·중의 하이테크 패권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과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 점에서 미·일의 협력 강화는 아이러니다.
하기우다 경제산업상은 방미기간 중 러몬도 상무장관, 캐서린 타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각각 회담하고, 바이든 행정부가 창설을 목표로 하는 인도태평양경제체제(IPEF)의 조기 출범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바이든 정권은 많은 우호국들을 불러들여 중국에 대항하는 경제권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IPEF는 일본 동남아 국가들과 무역과 공급망으로 연계해 중국에 대항하는 경제권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2021년 10월에 창설을 표명했다. 무역과 공급망 외에 탈탄소 등이 구체적인 협력 분야가 될 전망이다.
바이든 정권이 국내 반발이 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대신 내놓는 틀이다. 다만 참가국들이 서로 관세를 낮추는 시장 개방에는 망설이고 있는 형국이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참여하는 동아시아지역포괄적경제동반자(RCEP)가 출범했다. 중국은 TPP에도 가입을 신청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
기시 노부오(岸信夫) 일본 방위상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 5일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고 중국을 겨냥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변경을 불허한다는 방침에 합의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근거로 우크라이나에 가능한 한 지원을 계속한다는 방침도 확인했다.
오는 23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일본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회담한다. 기시다 정권은 대미동맹외교와는 별도로 ‘미들파워 외교’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두 달 반 가까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란은 전후 생긴 국제질서의 균열을 결정짓고 안보에 관한 새로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미·일·유럽 민주주의 세력과 중국·러시아 등 강권주의 세력은 어울리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어디까지 기댈 수 있느냐는 근원적 질문”을 하면서 제2의 새로운 방책을 생각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이른바 미들파워가 국제질서를 책임지는 시대를 그리고 있다. 미들파워는 초강대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일정한 경제력과 외교력을 갖고 가치관과 이념을 공유하는 세력이다. 국제질서의 안정을 담당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다. 일본은 미들파워의 연계와 이니셔티브는 영토와 주권의 존중이라는 좁은 의미의 안전보장뿐만 아니라 자유무역과 감염병 등 다양한 글로벌 이슈에서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모두가 법의 지배와 다자간 협력을 주춧돌로 하는 국제질서의 유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에너지와 식량의 안정공급, 기후변화나 감염증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에 관한 규칙과 제도의 구축·보강과 같은 작업은 개도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 이바지하면서 국제사회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측면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일본도 다른 나라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다양한 이슈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접근을 겨냥하고 있다.
기시다 정권의 경제정책 키워드는 ‘새로운 자본주의’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가 배태한 다양한 폐해를 시정하는 경제사회개혁에 도전하는 것이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실현하고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편익의 최대화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와 새 정부의 할 일을 담은 인수위 백서, 신임 각료들의 소견 발표들을 보면 일본 기시다 정부가 추진하는 새로운 정책들이 많은 합치점을 갖는다. 한·미·일 3국의 신 경제안보동맹 체제 행보를 밝게 해준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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