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희 칼럼] 삶에 대한 추앙의 형식으로 영상 서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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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희 카이스트 겸직교수.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입력 2022-05-30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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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희 카이스트 겸직교수]


 
알베르 카뮈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철학적 문제가 있다면 ‘자살’뿐이라고 얘기한다(알베르 카뮈, ‘부조리의 추론’, <시지프 신화>, 15쪽, 김화영 옮김, 서울: 책세상). 카뮈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사례로 든 것은 살지 말지에 대한 선택이 실존의 출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대부분은 살아갈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기왕 살기로 했다면 우리는 삶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같은 글에서 카뮈는 삶의 의미가 가장 절실한 질문이라고 얘기한다(16쪽).
 
‘합리’라는 이상 속에서 만들어진 근대에 ‘신’과 ‘종교’ 같은 제의적 가치가 갖는 의미는 크게 줄어들었다. 신형철의 말대로 근대인들은 신과 종교와 같은 “초월적인 버팀목들”과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406쪽, 파주: 문학동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합리적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대상이다. 아니 어쩌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더 적을지 모른다. 현대사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 사회>(송영배 옮김, 서울: 이학사)에서 삶의 의미 상실이 현대인이 시달리는 불안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하루하루 일상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것은 절실한 실존적 행위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상 서사를 보고 읽는 행위는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형식 중 하나라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소비와 같은 영상 서사를 보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여가 활동이다. 하지만 어떤 영상 서사는 보는 과정에서 혹은 본 이후에 무언가를 남긴다. 그리고 종종 뭔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나에게 영상 서사 소비는 보는 행위에서 읽는 행위로 전환된다. 영상 서사를 보는 일이 읽는 일로 바뀌게 되면 영상 소비는 일회성 소비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관련을 맺게 된다.
 
OTT가 주도하는 스트리밍 환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상 서사의 형식은 드라마다. 드라마는 플랫폼에 가입하도록 유인할 뿐 아니라 장시간 체류하게 하여 구독을 유지할 수 있다는 특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드라마는 방송 플랫폼과 OTT를 포함해 다양한 플랫폼에서 유통될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이는 드라마뿐 아니라 모든 영상 형식에 해당되는 부분이지만 드라마만큼 요긴한 장르는 찾기 어렵다. 이 때문에 높은 제작비가 소요되는 드라마가 많이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나에게 때때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가 있다. <나의 해방일지>다.
 
<나의 해방일지>는 기정(이엘 분), 창희(이민기 분), 미정(김지원 분) 세 남매의 얘기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가 ‘후계’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나의 해방일지>도 ‘산포’라는 경기도에 위치한 가상의 지역에 주인공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출퇴근이 어려운 경기도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산포’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고립성은 삼남매에게 극복해야 할 한계로 작용한다. <나의 해방일지>는 서울과 산포를 오가며 기정, 창희, 미정 삼남매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삶에 대해 가장 성찰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인물은 미정이다. 미정은 다른 사람들이 신에게 왜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같은 속된 것들에 대해 기도하는지 모르겠다고 자문한다. 나와 같이 속된 사람들은 신과 같은 제의적인 존재에게 현실적인 성취와 관련된 소망을 기원한다. 하지만 삶은 현실적인 성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미정은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고 얘기한다. 그 질문은 ‘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라는 삶의 의미와 관련된 것이다.
 
바쁜 일상을 영위해 나가면서 삶의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영상 매체 이용 환경이 편리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책과도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텔레비전을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폄하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영상 서사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영상 서사를 소비하는 행위는 의미 없이 흘러갈 수 있는 일상을 잠시나마 괄호 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의 해방일지>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추앙’이다. 미정은 구씨(손석구 분)에게 자신을 추앙해 보라고 얘기한다. 나는 <나의 해방일지>에서 얘기하는 추앙의 대상이 특정한 사람이 아닌 삶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추앙이라는 단어를 동원해서라도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미정이 얘기하는 것처럼 ‘삶에 대한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서사는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관심의 산물이다. 인간과 삶에 대한 비판적의고 회의적인 서사조차 삶의 의미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면 생산되기 어렵다. 소비량과 영향력 측면에서 영상 서사가 다른 유형의 서사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상 서사를 소비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별도로 내기 어렵다면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영상 서사를 보는 행위를 통해 잠시나마 삶을 괄호치고 성찰해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삶에 대한 추앙의 형식으로 영상 서사 읽기’라고 표현해 보면 어떨까?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행위가 된 영상 소비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노창희 필자 주요 이력 
 
▷중앙대 신문방송학 박사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겸임교수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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