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는 “고인은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주동자로 지목받아 사형선고를 받는 등 젊은 시절 갖은 고초에도 불구하고 5‧18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다”면서 “이 땅의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위해 걸어오신 고인의 숭고한 삶은 온 국민의 가슴에 잊히지 않을 등불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어 “서슬 퍼런 유신독재 탄압도, 80년 5월 신군부의 참혹했던 군홧발도 민주주의를 향한 고인의 간절한 염원과 의지를 꺾지 못했다”면서 “그렇게 고인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주셨다”고 회고했다.
광주시는 “평생 추구해온 민주주의와 광주 발전의 큰 뜻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29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광주시 동구 금호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5·18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식은 31일 오전 10시 옛 전남도청 앞인 광주 5·18광장에서 치러진다.
1943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5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맡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굴욕 외교'라며 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구속되고 제적됐다.
이후 37살이던 1980년, 전남대에 다시 복학했지만,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체포됐고 당시 김대중 총재 자택에 방명록을 남겼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내란 수괴 혐의로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감옥에서 지냈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와 5·18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을 지냈고, 1999년 광주 남구청장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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