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송해와 나눈 마지막 이야기를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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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이 객원기자
입력 2022-06-0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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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8일, 국민 MC 송해가 향년 95세 나이로 별세했다.

KBS 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현역 최고령 진행자로서 전 국민에게 매주 일요일 설렘과 행복을 안겼던 그였기에 안타까움이 컸다. 

내가 그를 처음 TV에서 본 것도 5살 무렵 전국노래자랑을 통해서다. 

그는 1955년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연예인을 그저 '딴따라'로 불렀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는 70년 넘는 세월 '딴따라'로 살아왔고, '딴따라'로 눈을 감았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떠난 그의 삶을 본보기로 삼기로 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장인정신'을 교훈 삼아 오늘도 힘을 내서 살아가기로 한다. 
 

[사진= 김호이 기자/ 송해]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전국노래자랑 하차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송해는 제작진과 스튜디오 녹화로 방송에 계속 참여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었다. 

지난 4월에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시청자를 만나는 모습에 반가움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모습은 추억으로 남게 됐다. 
 
과거, 나는 그를 두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지난 2019년 한 포럼에서였고, 두 번째는 지난해 11월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송해1927’ 기자간담회를 통해서였다. 

포럼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불러 포럼장을 웃음바다로 물들였다. 

송해가 "돌이켜보면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던 나이가 62세였는데, 당시 나이가 62세였다"면서 "그때 나에게 정말 잘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그와 인터뷰를 했다. 당시의 인터뷰가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안타까운 마음에 그와 당시 나눴던 인터뷰 내용을 회고한다. 

Q. 스크린 주연으로서 본인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왔잖아요. 완성본을 보셨을 때 굉장히 달랐을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A. 제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완성된 영화가 과연 저한테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상당히 심사숙고 하면서 봤어요. 근데 어느 순간 제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장면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당황하면서 봤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미안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많은 제작진과 합을 맞췄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해하면서 봤어요.(하하)

Q. 선생님의 삶을 다룬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의 심정이 어땠나요?

A.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거 못합니다"라고 했어요. 공연이나 방송을 통해 많은 분과 만나는 데 익숙했기에, 영화는 자신이 없어서 마다했지요. 그런데 제작자의 사정을 듣고 결심했어요. "아버님께서 저에 대한 열렬한 팬입니다" 하는 거예요. 아드님께서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니까, "송해 씨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떠냐"라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저를 통해서 부자지간에 얘기가 통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제가 한번 해보겠다고 했죠. 

Q. 30년 만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요?

A. 아들이 한남대교에서 사고가 나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그 후로는 제가 한남대교를 건너지 못했어요.

아들이 예술계로 나간다고 했을 때 몹시 나무랐어요. 그래서 꿈을 이루지 못했지요. 시간이 흘러 제가 조금 지나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난 후 자식이 바라는 것을 헤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막내딸이 아들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저는 존재조차 몰랐어요. 자격 없는 아버지라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아들의 노래를 듣는데, 마냥 떨리는 아들의 목소리가 더 안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Q. 국민MC, 일요일의 남자, 영원한 오빠, 살아있는 근현대사 등 선생님을 수식하는 별명 중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영원한 오빠가 제일 좋죠, 제가 받아들이기도 편안하고요(하하). 전국노래자랑 출연자 중에서 최연소자가 만 3세고, 최고령자가 115세 할머니셨는데 세대를 넘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해온 만큼 저는 ‘영원한 오빠’로 불리고 싶어요.
 

[사진= 김호이 기자/ 송해 선생님의 메시지]

Q. 지금 돌아봤을 때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요? 또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A. 월남 후 유랑극단을 거쳐 아픔을 많이 이겼어요. 삶의 원동력이 됐지요. 하지만 많은 어려움도 있었어요. 건강을 잃고 병원에 입원도 했죠. 퇴원 후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요. 남산 팔각정에 올라가서 마음으로 빌고 빌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했어요. 유언을 남길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눈 꼭 감고 뛰어내렸는데 소나무 가지에 걸린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갔던 순간이 가장 힘들었어요.
한창 커가고 있는 아이들한테 또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색을 안 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어요. 재기에 재기를 이어가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오늘날까지 버텨왔습니다. 

Q.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하셨는데요. 요즘 한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젊은 후배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나요?
A. 대중문화예술계에서 제가 제일 고령이 됐어요, 구봉서 형이 저보다 한 살 많은데 2016년 돌아가시면서 저만 남았죠. 연예계에 무슨 일만 생기면 가슴이 철렁해요. 책임감을 느끼죠. 전국노래자랑 출신 트로트 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잖아요. 그런 걸 보고나면 희망이 생겨요. 

Q. 장수하면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뭔가요?
A. 저희를 바라보는 분들이 없으면 저희도 존재가치가 없어요. 팬들이 재산이고 선물이에요. 저희가 하는 만사, 만원, 만행은 모두 여러분들이 주신 거에요. 
 

[사진= 김호이 기자/ 송해 선생님과 첫 번째 만남]

[사진= 김호이 기자/ 송해 선생님과 두 번째 만남]


먼 훗날 다시 그에게 묻고 싶다.
본인의 삶에 대해 만족하는지,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지.
그리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행복했다고. 그리고 떨어졌던 가족과 만나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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