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을 업종별로 다르게 적용하자는 주장은 매년 등장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한 발언이 촉매제가 되고 있어서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업종별 차등 지급'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첫 최저임금인 만큼 공약 이행에 힘이 실릴 수 있다.
"임금 인상 여력 없다" vs "생계비 최저선 보장해달라"
업종별 차등 지급의 핵심은 '노동자의 최저 생계비 보장'이 아닌 '사용자의 임금 지불 능력'이다. 지금까지는 최저임금이 마지노선이었다면, 차등 지급이 실시되면 그 금액이 최저임금 이하라고 해도 고용이 가능해진다.경영계는 지불 능력 한계에 놓인 업종의 특성을 고려해 차등 적용을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장기화에 고물가 상황까지 겹치면서 중소기업, 소상공인 등은 임금인상 여력이 없다며 연일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또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흡수할 여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노동계는 경영계와 상반된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최저임금을 차등 지급하게 되면 모든 노동자에게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최저선'을 보장해주자는 제도의 핵심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 상황과 사업자 입맛에 따라 임금이 정해져 노동자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노동계는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은 지난 30여년 동안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지적한다. 최저임금법 제4조 1항을 보면 '최저임금은 근로자의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생산성 및 소득분배율 등을 고려하여 정한다. 이 경우 사업의 종류별로 구분해 정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최저임금제 도입 첫해인 1988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다.
노동계는 업종별 낙인효과도 우려하고 있다. 최저임금 도입 첫해인 1988년에는 업종을 둘로 크게 나눠 차등 지급했다. 섬유와 의복, 식품 등을 만드는 경공업은 1군, 금속과 기계, 화학, 석유 등을 만드는 중화학 공업은 2종으로 분류했다. 당시 최저임금은 '10인 이상 제조업'에 적용했는데 1군은 상대적으로 낮은 시간당 462.5원, 2군은 시간당 487.5원을 적용했다. 이처럼 업종을 분류해 최저임금 하한선을 달리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는 업종에 대한 인상을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노동계는 최저임금 차등 지급 적용 시 제도의 본 취지가 사라질 뿐 아니라 최저임금 폐지를 위한 꼼수라고 봐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차등 지급' 공약 내세운 尹···노동정책 바로미터될 듯
이처럼 경영계와 노동계가 팽팽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윤 대통령의 공약인 만큼 기대감이 커지는 분위기다.윤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 친기업 행보를 약속하며 업종별 차등 지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3월 대선 유세 현장에서 "지불 능력이 없는 자영업자·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똑같은 수준으로 월급을 지급하면 도산할 수밖에 없다"며 "저 4%(강성노조)는 좋아하지만, 자영업자·중소기업은 다 나자빠지고 최저임금보다 조금 적더라도 일하겠다는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다 잃게 된다"고 말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최저임금을 논의할 때는 사용자의 지급 능력도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추 부총리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위해 국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서 "최저임금은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보장 측면과 소상공인·중소기업 등의 지급 능력도 균형 있게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향후 최저임금 논의 시 제반 경제 여건, 시장의 수용성 등을 종합 고려해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인사청문회에서 업종별 차등화에 대해 "(최저임금위원회) 위원들이 심의해 결정하면 가능하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 장관은 "위원들이 독립성을 가지고 논의하는데 (제가) 발언하는 것이 적당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과거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 지급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보인 것과는 다른 발언을 한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사안이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윤석열 정부의 첫 최저임금이자 새 정부 노동정책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어서다. 또 공약 이행에 대한 부담도 큰 상황이다.
다만 단기간에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업종별 최저임금 수준을 어떻게 나눌지, 매출과 직원 수는 어떤 기준으로 할지 등 세부 논의가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 노사 간 입장차가 첨예한 상황에서 단순히 표결만으로 밀어붙이기는 부담이 큰 상황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일각에서는 경영계가 '차등적용'을 양보하는 대신 최저임금 인상률에서 노동계의 일부 양보를 끌어내겠다는 복안이 깔린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40개국 중 7개국만 업종마다 임금 달리 준다
나라 밖 사정을 보면 업종별 차등 지급은 주된 흐름에서 벗어난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지난해 6월 내놓은 '주요 국가 최저임금 제도 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40개국 가운데 지역과 업종(직종)에 따라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나라는 일본, 벨기에, 멕시코, 브라질, 인도네시아, 스위스, 호주 등 7곳뿐이다.지역·업종별 최저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일본은 매년 7월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별로 최저임금액 목표치를 제시하고, 심사를 거쳐 10월 중순부터 효력을 발생시킨다. 지역별 최저임금이 결정되면 특정 산업 노사 요청에 따라 산업별 최저임금을 정할 수 있다. 산업별 최저임금은 지역별 최저임금보다 높은 수준에서 결정하게 돼 있다.
호주는 약 122개 직업군에 대해 직업별 최저임금을 규제하고 있다. 산업별 노사협의를 우선하되 산별 노사 협약이 없는 업종은 나라에서 정한 단일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그리스는 사무직과 비사무직(노동기술직) 등 2개 직종으로 나눠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필리핀은 업종과 규모에 따라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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