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큰 인기를 얻은 소설가 구병모 작가.
때로는 일상 속에서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소설가는 이런 소설 같은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구병모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 같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Q. ‘이게 말이 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설이나 만화, 영화에서 나올 법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그 경험은 어떤 경험인가요?
Q.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소설 쓰지 말라는 얘기를 종종 하잖아요. 소설가이신 구병모 작가님께서는 그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A. 사람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라고 할 때에는 그게 보통 긍정적인 의미인데요.
'소설 쓰고 앉아 있네' 할 때는 사기 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이지요.
그런데 그런 말들은 보통 제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니까요.
그리고 소설이 진정으로 사기가 아니냐 묻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는 딱히 거기에 공들여 대답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요.
물론 사회 지도층 인사나 언론 헤드라인은 그런 표현을 자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한번 관용어로 굳어버리면, 웬만큼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고서는 사라지기 어렵지요.
열심히 살아가는 타인의 직업에 대한 비하나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가 일상 스포츠 수준으로 만연한 세상에서는, 사라져야 할 말들이 지금도 워낙 많으니까, 신경 써주는 게 좋겠다는 뜻이지요.
Q. 소설가로서의 구병모, 사람으로서의 구병모는 어떤 사람인가요?
A. 소설가로서의 자아와 생활인으로서의 자아를 구분하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들리는데요, 저는 오히려 소설가는 그냥 사람이고, 사람은 그가 쓴 소설과 철저하게 분리돼 생각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릴게요. 저는 자전적인 서사를 '아예'라고 할 정도로 거의 쓰지 않는 편인데, 어느 날 환상이나 SF나 비현실이 일절 가미되지 않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쓰면, 사람들이 바로 단정 지어 버려요. 이거 네 얘기지? 네가 겪었던 일이지? 혹은 네 모습이 이 인물에 몇 프로 정도 반영되어 있느냐고요. 제 얘기도 아닐뿐더러, 제 모습이 몇 프로가 반영됐다고 치면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일단 사람으로서의 구병모는 어떤가 하면, 지금까지 앞서 이어진 답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짐작하셨을 텐데, 꿈도 희망도 없고 가슴속엔 만성적인 울분이 쌓여 있는, 그러면서도 건조하고 냉랭한 사람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타인을 대할 때 그걸 굳이 티내지는 않을 만큼의 사회성을 최소한 장착하고 있는 거고요.
Q. 소설은 처음에 어쩌다가 쓰게 됐고, 소설가라는 직업은 어떻게 갖게 됐나요? 그리고 직업만족도는 5점 만점에 몇 점이고 구병모가 경험한 소설가라는 직업은 어떤 직업인가요?
A. 소설가가 되겠다고 확실하게 결정한 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4학년 또는 5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쓰기 시작해서 워드프로세서로 넘어오기 전까지 쌓인 200자 원고지 묶음이 지금 집 창고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어쩌다 쓰게 됐는지는 노코멘트입니다. 밝고 유쾌한, 뭐가 됐든 외부에 막 오픈하고 다닐 만한 긍정적인 계기가 아니라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세월이 됐으면 이것은 이제 직업의 기준에서 바라보고 객관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거예요. 삶 자체이거나, 일종의 카오스라고 봐야 하지요.
Q. 직업병이나 소설을 쓰기 위한 일상 속 습관들이 있나요?
A. 신문을 읽다가 오탈자가 난 걸 참지 못하겠다는 쪽의 직업병 말고, 직업으로 인해 생긴 실제적인 병이라면 지금 갖고 있어요. 떨어진 시력, 만성적인 팔꿈치 통증, 오른손 손가락에 방아쇠수지가 생겨서 입력하는 일이나 펜을 쥐고 쓰는 일이 어렵고, 목디스크가 와서 손이 저린데 여기서 더 심해지면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쥐고 있던 펜도 놓치게 되지요. 병원에 거의 출석부를 찍지만 치료든 운동이든 지금은 악화의 속도를 늦추는 정도고, 이제는 나이도 있어서 일을 계속하는 한 이런 몸을 갖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Q. 소설가로서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소설은 뭔가요? 글이든 그림이든 자신의 작품에 만족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A. 일단 발전 욕망이 있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만족을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서요. 저 자신도 마찬가지고 그게 인간의 본능이거든요. 그런데 ‘이만하면 됐다, 충분하다’라는 느낌의 만족 말고, ‘최소한 전과는 다른 걸 했다’는 작은 성취는 느낀 적 있어요. 그게 작년 11월에 발간한 '상아의 문으로'라는 장편소설입니다. (이건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라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걸 끝까지 읽어내는 데에 성공하신 분들은 경악하시는 거죠. “'위저드 베이커리'를 쓴 사람과 '상아의 문으로'를 쓴 사람이 동일인물이라고? 정말로?” 비록 마니악하고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지언정, 지금까지 이뤄낸 성과에 만족하면서 안락한 자리에 뭉개고 앉아 있지는 않겠다는 작가로서의 선언은 확실하게 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걸, 더 많은 걸, 더 좋은 걸 원한다는 의미에서의 만족을 추구한다면 그게 뜻대로 안 되고 쉽게 지칠 건데, ‘어제와는 다른 걸 했다’ 이렇게 생각의 방향을 변화 쪽으로 바꿔 보면 조금은 도움되지 않을까 해요.
Q. 요즘 배우 윤여정 선생님과 밀라논나 선생님처럼 멋있게 늙어가는 이 시대의 진짜 어른들이 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나요? 꿈에 그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있나요?
A. 2012년에 '파과'를 집필할 때는, 아마 노년이 되어서도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강인하고 날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 해본 적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건 제가 당시 젊고 건강한 나이라 노년의 일상 문제나 노년의 생애사에 대해서는 학습을 통해서만 아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뭘 잘 몰라서 그랬던 거고, 저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지금은, 노년에 맑은 정신과 비교적 괜찮은 몸 상태로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게 멋있는 거고 그거야말로 축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무너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A. 제가 직접적인 희망과 위로의 코드를 남발하는 걸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은 앞에서 충분히 언급한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그걸 믿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행복에 대해서는 손쉽게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즉 당신은 넘어지지도 다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난 자리에, 짓눌린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는 걸 상상해보자는 얘기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꽃대를 일으켜 세워주고 흙으로 다시 잘 덮어 두드리는 자신의 모습을.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