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시장이 식어가며 집값이 조금 떨어지고 있는데, 시기를 보고 자녀에게 증여를 할 생각입니다. 오히려 저렴하게 증여할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매매를 고려해봤는데, 팔아서 나온 돈으로는 다시 집을 살 수가 없어서 물려주려구요.” (동작구 거주 60대 김모씨)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를 한시적으로 유예하고 대출규제를 완화하는 등 시장 활성화를 위한 부동산 정책이 나오고 있지만 집값 고점 인식과 금리 인상으로 거래절벽을 해소하지는 못하고 있다. 집값 조정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부 집주인은 집을 파는 대신 아파트 증여를 선택하고 있다.
5일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서울 아파트 증여 건수는 830건을 기록했다 올해 들어 가장 많은 수치로, 지난해 7월(1286건) 이후 가장 많다. 전체 서울 아파트 거래 건수 4835건 가운데 증여는 17.2%를 차지했다.
5월의 증여 비중도 높았지만 지난 4월은 역대 손꼽힐 정도였다. 지난 4월 서울 아파트 증여는 812건으로 3월(525건) 대비 54.7% 늘었다. 특히 서울 전체 거래 3508건에서 증여가 차지하는 비중은 23.1%를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부동산원에서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2006년 이래 역대 두 번째로 높다. 첫 번째는 지난해 3월 24.2%였다.
거래절벽·집값 조정기…파느니 물려준다
아울러 금리 인상으로 인한 이자 부담, 대출 규제, 새 정부 공급 기대감 등으로 매수심리도 위축된 상황이다. 지난 27일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수급지수는 87.0으로 이전주와 비교할 때 1.0포인트(p) 넘게 하락했다. 5월 9일부터 8주 연속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100을 기준으로 잡고 이보다 아래로 내려가면 집을 팔 사람이 살 사람보다 많다는 의미다. 지수가 100보다 커지면 반대의미다.
정부는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를 지난 5월부터 내년 5월까지 1년간 한시적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대출 이자 상승 등으로 인해 자금 여력이 줄어든 수요자들은 집값이 더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관망하는 중이다. 반면 이런 상황에 일부 집주인들은 증여를 택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집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증여는 이른바 ‘똘똘한 한 채’가 있는 지역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5월 전국적으로 보면 전체 거래(6만3769건) 중 증여(4008건)가 차지하는 비율은 6.2%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가주택과 정비사업 수요가 많은 서울에서는 증여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특히 지난 5월 증여가 많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보면 서울에서도 정비사업 기대감이 큰 곳이었다. 자치구 중 증여가 가장 많이 이뤄진 곳은 강남구였다. 강남구의 5월 아파트 증여 건수는 111건으로, 4월(63건)보다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어 서초구(79건) 강북구(70건), 노원구(60건), 송파·강동구(58건) 등이 뒤를 이었다.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노후 아파트의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곳이다. 강남구에 있는 대치동 은마 아파트, 압구정 현대 아파트 등은 가장 유명한 재건축 아파트로 꼽힌다.
노원구는 서울에서 가장 많은 200여개 아파트 단지를 보유한 지역으로 1990년 이전에 준공돼 재건축 연한 30년을 넘기거나 앞둔 아파트 단지가 다수다. 도봉구 역시 창동 주공3·4단지 등 크고 낡은 아파트 단지들이 다수 있다. 강북구도 마찬가지다.
우병탁 신한은행 WM컨설팅센터 부동산팀장은 "3~5월엔 종부세 등 다주택자 세금 부담이 가시화하며 증여가 늘어나는 시기"라며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팔거나 증여해야 한다. 매매 대신 증여를 택한 집주인들은 앞으로도 집값이 더 오를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 팀장은 "노·도·강은 다른 서울 지역과 비교할 때 비교적 저렴해 증여하기 쉽고, 재건축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지역이다. 강남권 또한 정비사업이 많은 곳"이라며 "증여를 한 뒤 최소 5년 동안은 시장에 내놓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증여를 한 후 5년 내에 매매를 하면 증여 시 시세가 아니라 증여 전 취득가액으로 양도세를 물어야 할 수 있다.
또 다른 부동산 전문가도 “현재 서울이 전반적으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개발 호재가 있거나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강남권 일대 고가 아파트를 보유한 사람들은 증여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며 “남에게 팔아버리면 다시 못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담부 증여 수월해져…내년까지 증여 비중 높을 것
한편 최근 몇 년간 증여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 국세청이 공개한 2분기 국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엔 증여재산 가액이 50조5000억원으로 2020년보다 15.8% 늘었다. 그중 건물(19조9000억원)이 가장 많았는데 집값과 보유세가 같이 급등하며 증여를 택하는 다주택자가 많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부담부 증여의 영향으로 앞으로도 증여 비중이 높은 현 상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부동산 시장 열기와 보유세 증가가 역대급이었던 지난해보다는 절대적인 건수나 금액은 줄어들 전망이다.
부담부 증여는 주택을 증여할 때 소유권을 넘겨받는 사람(수증자)이 채무(전세보증금·대출금)를 승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세보증금이 7억원이 있는 10억원짜리 아파트를 부모가 자녀에게 부담부 증여한다면 증여재산가액은 시가 10억원에서 전세보증금 7억원을 제외한 3억원이 된다. 수증자(자녀)는 3억원에 대해서 증여세를 물고, 증여자(부모)는 7억원에 대해 양도세를 부담하게 된다는 뜻이다.
부담부 증여를 잘 이용한다면 전체적인 세금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부담되는 세금 비중도 줄일 수 있다. 다만, 부담부 증여를 할 경우 인수한 채무나 전세보증금은 자녀가 상환해야 하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우병탁 팀장은 “지난 5월 10일 이후 양도소득세 중과 1년 한시 배제 조치에 따라 부담부 증여 시 양도세 완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며 “시기별로 등락은 있겠지만, 양도세 완화가 이어지는 내년 5월까지는 증여가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