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영의 재팬플래시] 아베의 빛과 그림자에 갇힌 日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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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前뉴시스 도쿄특파원·日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
입력 2022-08-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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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영 前 뉴시스 도쿄특파원·日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

지난 7월 8일 암살범의 사제 총격에 사망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국장(國葬)이 오는 9월 27일 도쿄에서 거행된다. 고인이 사망한 지 80일 만에 국장을 치르는 것은 일본의 독특한 장례 문화에 따른 것이지만 이 때문에 아베 전 총리에 대한 평가와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란이 상당 기간 현재형으로 뜨겁게 지속될 전망이다.

일본에서는 거물급 인사나 유명인은 대개 장례를 두 번 치른다. 우선 고인이 사망한 후 며칠 내로 치르는 가족장은 가족과 아주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해 밤을 새우면서 고인을 추모한다. 가족장을 치른 뒤 몇 주 또는 몇 개월 뒤 다시 오와카레카이(お別れ会)라고 부르는 고별식을 하는데, 보통 정당, 회사, 학교 등 고인이 속했던 단체나 기관 주최로 치른다.

일본에서 첫 국장이 치러진 것은 메이지유신(1868년)의 주역으로 외무대신 등 고위직을 두루 맡았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1883년에 암으로 사망했을 때였다. 1926년에는 국장령(令)을 제정해 왕족이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은 국장을 치를 수 있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일본 점령으로 국장령의 효력이 상실됐지만 1967년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내각은 국장을 전격 결정했다. 전후(戰後) 유일한 전직 총리 국장이었다. 일본은 1945년 패전 전이나 후에도 ‘총리 경험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국장 대상자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전직 총리들은 대부분 내각·자민당 합동장으로 거행됐다.

당초 아베 전 총리 가족장이 끝난 뒤 공식 장례식은 관례대로 내각·자민당 합동장이 검토됐다. 아베 전 총리 사망 직후 그의 죽음이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탓에 추모 분위기는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조됐고 곧이어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국장 이야기를 쉽게 꺼낼 상황은 아니었다. 전직 총리의 국장이 55년간 없었고, 아베의 치적이 요시다와는 견주기 어렵다는 의견이 높았기 때문이다. 요시다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조인했고 총리를 다섯 차례 역임하면서 전후 일본의 부흥을 이끌어 오늘날 일본을 만든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아베의) 국장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지난달 22일 각의를 통해 아베의 국장을 전격 결정했다. 아베 추모 분위기와 참의원 선거 압승 등을 고려하면 국장을 치를 만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기시다 총리로서는 당내 최대 파벌인 아베파를 위한 배려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기시다는 자민당 내 ‘고치카이(宏池会)’로 아베와는 파벌을 달리한다. 또 해외에서 아베의 지명도와 인기가 높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애도 분위기도 높은 만큼 외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게 될 국장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장 발표 이후 일본 국내 분위기는 오히려 냉랭해지는 느낌이다. 일본의 일반 여론은 국장이 과하다는 쪽이다. 기시다 총리는 아베가 역대 최장 재임 총리로서 동일본대지진을 극복하고 경제를 회생시켰으며 외교에서도 큰 업적을 냈다는 점을 내세우지만 다수 국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것이다.

국장 발표 직후인 7월 30일부터 이틀간 실시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국장 반대 53.3%, 찬성 45.1%로 나타났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서도 반대(47%)가 찬성(43%)을 앞질렀다. 보수 성향인 요미우리신문은 찬성이 49%로, 반대 46%를 간발의 차이로 앞섰다. 도쿄에서는 국장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국장 반대 여론은 아베 전 총리를 암살한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이하 가정연합)에 대한 원한으로 아베 전 총리를 노렸다고 진술했고, 이후 실제로 가정연합과 자민당의 유착 의혹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주간지가 흥미 위주로 다루던 ‘아베·가정연합 커넥션’은 어느새 주요 일간지와 방송까지 가세하면서 이제는 일본 정국이 온통 이 문제에 휩싸이는 형국이 됐다. 아베가 야당 시절부터 가정연합의 지원을 받았다거나,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도 가정연합과 깊은 관계였다는 보도 등이 나왔다. 아베파 소속 의원들이 가정연합에서 정치헌금을 받거나 신자들의 조직적인 표를 얻었다는 주장도 쏟아지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1일 각료 19명 중 14명을 바꾸는 대규모 개각을 단행했지만 분위기를 크게 바꾸지 못했다.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 ‘개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응답은 45%에 그쳤고 특히 ‘가정연합과의 관계 해명이 불충분하다’는 의견은 55%였다.

그렇다고 아베에 대한 일본 국민의 평가가 부정적으로 기울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베가 현 시대 일본 보수세력의 아이콘이자 강력한 실행자였다는 평가는 여전히 굳건하다.
아베의 목표는 일본의 ‘정상국가화’였다. 그는 2012년 12월 다시 정권을 잡자마자 이른바 ‘평화헌법’ 개정을 내걸었다. 전쟁 포기와 전력(戰力)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 헌법 9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자위대의 지위를 헌법에 명기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제시하면서 개헌 여론에 불을 지폈다.

이를 위해 아베는 관료가 이끌던 나가타초(永田町·일본 의회와 총리 관저가 있는 곳으로 정계를 의미)의 생리를 정치 주도로 바꾸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를 바탕으로 성장 위주의 보수적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안보정책도 추진했다. 미·일 동맹에 의존하며 소극적이라는 소리를 듣던 일본 외교도 적극적으로 탈바꿈시켰다. 최근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자유롭게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도 원래 아베 내각의 아이디어였다. 경제적으로만 부유한 일본을 이제야말로 외교·군사 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베의 구상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계파를 이어받는 정치적 계통을 보수본류(保守本流)라고 말한다.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해서 만든 자민당은 여러 정치적 지향성을 가진 정당이었다. 그중에서도 큰 줄기는 경제 대국을 목표로 하는 요시다 노선과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기시 노부스케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시다 노선이 군사력보다는 경제력을 중시해 미·일 안보체제 아래 자유 경제 활동을 중시했다면, 기시 노선은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고 자주 헌법의 제정 등을 주장했다.

요시다 노선은 이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등으로 이어지는 ‘고치카이(宏池会)’로 계승되었고, 지금의 기시다 총리가 여기에 속한다. 기시 노선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가 만든 ‘세이와카이(清和会)’로 계승되었고, 지금의 아베파로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두 파벌의 가운데에는 요시다의 애제자이면서 기시의 동생이었던 사토 에이사쿠 파벌에 기원을 둔 ‘게이세이카이(経世会)’가 있다. 전후 냉전체제 아래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일본으로서는 고치카이와 게이세이카이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등으로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일본도 독자적인 안보정책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버블 경제의 붕괴로 경제성장도 한계에 부딪쳤다. 그러면서 200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아베 등 세이와카이 출신 총리가 연이어 등장하게 된다.

이 중에서도 아베는 민족주의 성향을 특히 강하게 드러냈다. 정통 보수본류인 고치카이의 리더인 기시다와 아베의 갈등이 때때로 표출되던 장면도 두 사람의 저변에 흐르는 정치적 이념의 미묘한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베를 잃어버린 아베파. 일본의 보수세력 중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아베파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당장은 아베파에서 아베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당내 최대 파벌로서 영향력이 쉽게 약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시다 총리도 이번 개각에서 아베파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분간은 아베에 대한 추모 분위기에서 그의 유지를 받들자는 파벌 내 목소리가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심인물의 부재 속에 아베의 이념이 얼마나 힘을 가질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벌써 아베의 평생 과업이었던 개헌이 의회 내 개헌 세력의 확보에도 불구하고 추진력이 약화하지 않겠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기시다 총리가 구심력 부재인 아베파를 어떻게 흡수해 나갈지도 관심거리다. 당분간은 일본 정치가 죽은 아베의 빛과 그림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듯하다.

[미니 박스] 
 
아베의 기록
 
아베는 ‘전 총리’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일본 정계의 실력자로 군림해왔다. 지금의 기시다 내각에서도 상왕이라고 불리면서 집권 자민당은 물론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베는 총리로서 여러 기록을 세웠다. 일본 총리로서 총 재임 기간은 3188일(약 8년 9개월), 연속 재임 기간은 2822일(약 7년 9개월)로 각각 최장 기록을 세웠다. 그는 또 전후 세대 출신의 첫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아베는 무엇보다 아베노믹스로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던 일본 경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개혁을 미룬 채 지나친 통화 확장 정책 등으로 오히려 잃어버린 20년-30년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일본 내 비판도 만만치 않다.
아베는 외교적으로는 강력한 미·일 관계를 토대로 일본 외교의 역량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에 대해서도 지나친 미국 추종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아베는 ‘2020 도쿄올림픽’을 유치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극복을 세계에 과시하려 했지만 코로나19의 창궐로 올림픽 개최가 1년 연기되는 등 곡절을 겪기도 했다.
 


조윤영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북한학 석사 △일본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석·박사 △뉴시스 도쿄특파원 △<北朝鮮のリアル(북한의 현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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