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운동 산증인'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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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디지털미디어부 편집장
입력 2022-08-2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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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년 상하이서 출생한 '임정둥이'

  • 조부·부모 이어 3대째 독립운동 투신

  • 광복 후 민주화에 기여, 모란장 서훈

지난 2018년 10월 회고록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사진=아주경제DB]


항일 독립 투쟁의 산증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23일 영면했다. 향년 94세.

김 회장은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부부 독립운동가 김의한 선생과 정정화 선생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상하이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1932년 저장성 항저우로 이전하기 전까지 독립 운동의 구심이었던 곳이다. 그 와중에 태어난 김 회장을 '임정둥이'로 부르는 이유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 애국단원과 한국독립당(한독당) 감찰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주계 등을 역임했다. 모친인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책임졌고,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독립 자금 조달을 위한 밀사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조부이자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지낸 김가진 선생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10월 74세의 고령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일조하고자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로의 망명길에 오른 애국지사다.

고인 역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대원으로 참가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한독당과 광복군 실무를 수행해 왔다. 3대가 항일 독립 운동에 투신했던 셈이다. 

김 회장은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던 백범 김구 선생은 물론 윤봉길 의사와 이동녕, 이시영 등 중국에 머물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당시 7세의 김자동 회장(오른쪽)이 모친인 정정화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아주경제DB]


광복 후에는 보성중학과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조선일보·민족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이 사형 당하는 것을 목도한 뒤 언론계를 떠났다.

김 회장은 군사 정권의 지속적인 회유를 뿌리치며 민주화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해 왔다. 한국 전문가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최대 업적은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출범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회장직을 유지할 만큼 항일 독립 운동의 역사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 같은 공적들을 인정받아 지난 3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고인이 공개적으로 밝힌 회한은 조부인 김가진 선생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오지 못한 점이다. 유해 송환을 위해 지난 30년간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8차례나 반려됐다.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사촌형도 서훈을 받았는데 할아버지만 못 받은 건 말이 안된다"며 "우리 집안이 독립 운동을 하게 된 게 할아버지 때문인데"라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딸인 김선현 오토그룹 회장도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증조부(김가진 선생)가 순국한 지 100년이 돼 가지만 (상하이의) 쑹칭링 능원에 쓸쓸히 묻혀 있어 가슴이 아프다"며 "나라를 위해 순국한 분들의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소회를 전한 바 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26일이다. 한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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