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취임사에 따르면 자유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공유되어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그래서 정확히 인식되고 재발견될 필요가 있다고 언급된다. 하지만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제시되지 않고, 자유가 있고 자유가 확대되는 국가에서 “번영과 풍요, 도약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자유의 효과만 강조될 뿐이다. ‘X이면 Y이다’라고 말하지만, X가 무엇이고, 왜 X이면 Y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래서 자유가 있어야 번영과 풍요, 도약과 혁신이 있다는 말은 단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경제적 기초, 공정한 교육, 문화적 접근”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공정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언급에서도 자유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8월 15일 광복절 축사에서도 자유의 개념은 제시되지 않는다. ‘자유’의 가치는 단지 세 가 지 맥락에서 언급된다. 첫째, ‘자유’는 역사의 맥락에서 묘사된다. 역사는 “자유를 되찾고, 자유를 지키고,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독립운동, 경제 발전, 민주주의 실현, 세계 시민 되기, 한·일 관계와 남북 관계의 개선은 자유의 실현 과정이 된다. 둘째, 자유는 국가 정책의 맥락에서 목표가 된다. 공적 부문 긴축과 구조조정으로 재정을 확보해서 사회적 약자, 장애인, 청년, 소상공인을 지원하고 주거복지를 달성하면 자유가 실현된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 자유는 혁신과 도약의 맥락에서 원인으로 가정된다. 민간 부문의 규제를 풀어 기업 활동을 자유롭게 해야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 방안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취임사와 광복절 축사에서는 자유가 무엇인지 그 실체에 대한 설명은 없고, 자유의 조건과 효과만 맥락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자유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단서 하나가 있긴 하다. 그것은 취임사에서 등장하는 “자유는 승자독식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다. ‘승자’는 어떠한 상황에서 이긴 후 힘을 갖게 된 ‘강자’를 의미한다. 힘이 있는 강자는 타자의 자유 의지에 반해서 자의적으로 자신의 자유 의지를 관철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는 승자독식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강자가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힘은 ‘부정’된다. 그렇게 언명된 자유는 ‘간섭의 부재’인 소극적 자유를 넘어선다. ‘자기 결정’을 의미하는 적극적 자유에 가깝고, 법에 의한 간섭으로 ‘자의적 지배의 부재’를 추구하는 공화주의적 자유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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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자의적 자유와 관련하여 플라톤(Plato)은 <국가론>에서 생각할 거리로 이야기 하나를 제시한다. 기게스의 반지 신화인데, 줄거리는 이렇다. 리디아에 기게스라는 양치기가 있었다. 어느 날 들판에 지진이 났는데 그는 땅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서 금반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반지의 보석받이를 안쪽으로 돌리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해주는 절대 반지였다. 그는 반지의 힘을 이용해서 리디아 왕을 살해하고 왕국을 장악했다. 절대 반지는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의적 자유, 즉 처벌과 시선을 무시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상징이다. 예컨대 검찰, 언론, 정치인의 권력이 절대 반지의 힘과 유사하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두 사람에게 절대 반지가 주어지면 어떻게 될까? 둘 다 불의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속성상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남에게 해를 주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이다.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자유의 사상가 칸트(Kant)에게 들려주면 뭐하고 할까? 그가 쓴 <실천이성비판>에 따라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반지로 불의를 저지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이성은 자유의 이념을 일상에서 조건 없이 적용하라고 지시합니다. 자유의 이념은 자율입니다. 자율은 스스로 정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율적이기 때문에 존엄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절대 반지를 사용하며 불의를 저지르면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자유가 확보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반지로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준칙을 스스로 정하고 따르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모두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자유를 실현하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목적의 나라(Reich der Zwecke)’를 꿈꾼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절대 반지의 자의적 사용으로 인해 누구도 피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최고의 불의는 자신의 불의를 절대 반지로 가려서 처벌받지 않고 정의로운 척하고 혼자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인은 정의를 사유하는 ‘철인 왕(philosopher king)’이어야 했고, 그 철인 왕은 강자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위한 법을 제정하여 정의를 실현해야 했다. 그것은 인치와 결합된 법치였다. 칸트가 제시한 ‘목적의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반지를 사용하며 불의를 행해도 처벌받지 않는 강자의 자의적 지배는 ‘목적의 나라’에 부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존엄성이 보장되는 ‘법치 국가(Rechtsstaat)’를 제시했다. 윤 대통령이 “자유는 승자독식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칸트의 법치국가를 의미했을까? 그는 절대 반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플라톤의 철인일까?
윤 대통령은 과거에 검사와 검찰총장을 하면서 기게스의 절대 반지를 끼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의 자유에 대한 선험적 가치는 강자의 자의적 자유를 부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두 개의 연설에서 자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언급되지 않았던 것도 실제 본인의 자유에 대한 선험적 가치가 강자의 ‘자의’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어떻게 강자의 ‘자의’를 ‘자유’라고 언명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 “자유는 승자독식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통해 자유는 강자의 자의가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러한 부정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실제 인식을 가리기 위한 부정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여기에서 실제 인식이란 자유를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강자의 자유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김건희 여사도 배우자의 절대 반지를 복사해서 커플링 반지를 끼고 자연스럽게 강자의 자의를 누려왔다. 무엇보다 현재 김 여사에게는 배우자가 대통령이라는 최고 단계의 커플링 반지가 주어져 있다. 벌써부터 김 여사의 반지 사용이 감지된다. 예컨대 182회(2022년 8월 28일) MBC '스트레이트'는 한남동 대통령 관저와 용산 대통령 집무실의 리모델링을 수주한 두 회사가 김 여사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윤 대통령이 김 여사의 반지 사용을 용인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면 국민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역시 윤 대통령은 본인의 말과 다르게 실제로는 자유를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강자의 자유로 인식하고 있구나···.
장준호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뮌헨대(LMU) 정치학 박사 △미국 UC 샌디에이고 객원연구원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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