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그동안 어찌 보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어야 하는 ‘드레스코드’가 된 ESG 경영은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ESG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양상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그동안 ESG를 앞장서 주도해온 EU(유럽연합)는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줄이자 궁여지책으로 화석연료 발전을 늘리고 있다. 그러자 ESG가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한 EU의 응수는 중장기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원전 및 재생에너지 생산 확대다. 길게 보면 러시아가 자충수에 몰릴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ESG가 이른바 ‘문화전쟁’의 이슈가 되고 있다. 공화당 인사들이 ESG와 기후변화 논의에 대해 좌파적 사고라며 이를 정치·이념 이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공화당 인물은 대선 주자 후보군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주지사. 그는 지난달에 주연금이 투자 의사 결정을 할 때 ESG를 고려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화당 소속 정치인이 주지사인 텍사스주도 이 대열에 섰다. 주정부가 에너지 기업들을 ‘보이콧’하는 블랙록 등 금융 기업과 금융거래를 중단했다. 화석연료 기업들이 공화당의 주요한 돈줄이라는 점과 관련이 깊은 움직임이다. 하지만 ‘반(反)ESG’를 대세로 보긴 어렵다. 바이든 행정부가 관련 입법을 통해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데다 민주당이 ‘지휘봉’을 잡은 캘리포니아주 등 다른 주에서는 친ESG 정책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전반적 여론도 ESG와 기후변화 대응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이런 가운데 영국 주간지인 더 이코노미스트 7월 21일자는 ESG를 특집으로 다뤘다. 이 잡지도 ESG에 대해 심도 있게 문제를 제기했다. 먼저 서로 상충되는 목표를 제시하고 지표가 표준화돼 있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특히 기업이 좋은 일을 해도 성과가 좋은지 그 상관관계가 불분명하고 등급이 기관마다 들쭉날쭉하게 나오는 등 결함이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잡지는 그렇다고 ESG를 폐기하자는 뜻은 아니라며 개선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ESG에 대한 이 같은 공방은 사실 벌어질 때가 돼서 벌어지고 있는 측면이 있다. ESG에 대한 논의가 실행 의지와 맞물리면서 본격화한 것은 2년여에 불과하다. 환경과 사람을 돌보는 투명한 경영을 하자는 큰 방향성은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지만 디테일은 정비되지 않은 게 많은 실정이다. ESG에 대한 공격은 그 기반을 잘 다져나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ESG에 대한 논의는 최근 본질적으로 국면이 달라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두드러진 변화는 그동안은 ESG를 왜 해야 하는지, 즉 ‘Why’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면 이제는 ESG를 어떻게 실행에 옮기고 구체적인 성과를 낼지, 즉 ‘What & How’로 논의의 초점이 옮겨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ESG 경영 논의의 폭이 넓어지면서 심도(深度)도 깊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변화를 ‘넥스트 ESG’로 규정한다.
넥스트 ESG의 핵심은 가속화하고 있는 제도화다. 기후공시, 공급망 대응, 탄소국경조정세 등 기업들이 실제로 대응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 먼저, 기업이 탄소를 얼마나 배출하고 있는지를 공시하도록 하는 ‘기후공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탄소를 배출하고 있는 기업의 가치사슬 경로에 대해 알아보자.
기업이 탄소를 배출하는 영역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스코프(scope) 1, 스코프 2, 스코프 3이다. 이 중 스코프 1은 기업이 소유하고 통제하고 있는 곳에서 직접 발생시키는 탄소 배출이다. 화학 공정, 보일러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다음으로 스코프 2는 기업이 사용하는 전기와 동력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다. 마지막으로 스코프 3. 기업이 원자재 등을 사들이고 제품을 판매하는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을 말한다. 여기에는 기계 구입, 폐기물, 수송, 유통, 판매 제품의 가공, 자산의 임대차 등이 포함된다. 직원이 해외 출장을 가거나 출퇴근을 할 때 배출되는 탄소도 들어간다. 그만큼 기업으로서는 측정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운 영역이다. 중요한 점은 절반 이상의 탄소 배출이 스코프 3에서 이뤄져 이를 관리하지 않고는 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현재 기업들이 탄소를 얼마나 배출하고 있는지를 공시하도록 하는 논의는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지난해 10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협약당사국총회에서 출범한 ISSB(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 이 기관은 최근 발표한 기후공시 프로토타입(prototype)에서 앞에서 설명한 스코프 1, 스코프 2, 스코프 3를 기업이 모두 공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특히 스코프 3에 대해서는 관련 활동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ISSB는 올해 안에 최종안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이 안이 확정되면 여러 국가와 규제기관에서 신속하게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ISSB 안이 G20와 국제증권관리위원회 등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별도로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도 지난 3월 상장기업에 기후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탄소 배출의 경우 스코프 1과 스코프 2는 모든 상장사가 공시하도록 했다. 다만, 스코프 3 공시는 ISSB 안보다는 다소 완화된 내용이다. 스코프 3 탄소 배출이 상장사에 중요하거나 상장사가 스코프 3를 포함한 감축 목표를 설정한 경우로 제한했다.
지금까지 소개한 기후공시 방안은 시행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이 보완이 필요한 부문에 대해 의견을 낸 상태여서 일부 내용도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탄소 배출량 공시 자체는 새로운 글로벌 룰로 도입되는 게 대세다. 탄소 배출이 많은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 산업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려면 피할 수 없는 흐름이어서 세밀한 대응이 필요한 때다.
이와 함께 EU가 시행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공급망 실사 지침도 잘 대응해야 할 제도로 꼽힌다. 이 지침은 기업이 글로벌 가치사슬 전반에서 아동 노동 등 인권을 훼손하고 오염과 생물다양성 손실 등 환경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업 본사와 자회사 그리고 공급사슬에서 인권과 환경에 대한 실사 의무를 갖도록 했다. 이 의무를 위반한 기업에는 벌금 부과 등 제재가 가해진다. 중요한 대목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통해 기업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 실사 지침은 EU 의회와 이사회에서 1년여 동안 협의를 거쳐 승인될 예정인데 최종 채택되면 회원국들은 2년 안에 국가별로 법률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이에 따라 EU 지역에 수출하는 국내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EU에 지사를 설치한 기업은 물론 EU 기업과 거래해 공급망에 포함된 기업들이 지침 적용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글로벌 기업들이 공급망 실사를 협력사 선정 시 주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어 이래저래 인권과 환경에 대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국제무대에서 외면받을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생산성본부는 공급망 실사법이 발효되면 자동차부품, 반도체, 제약, 바이오, 화장품 등 산업이 우선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적용 범위가 확대된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도 국내 기업의 피해가 우려된다. CBAM은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대해 탄소국경세를 물리겠다는 것이 골자다. 1년 전에 나온 EU 집행위원회 안만 해도 대상이 철강, 시멘트, 비료, 알루미늄, 전력 등 5개 분야였지만 지난 6월에 나온 유럽의회 안은 유기화학물질, 플라스틱, 수소, 암모니아 등 4개 업종을 추가했다. 시범 시행기간도 2024년 12월로 1년을 앞당겨 CBAM 시행 자체가 더 빨라지도록 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EU 지역에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들은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예컨대 석유화학 기업은 수출액의 5%, 철강은 10%까지 탄소국경세를 물게 될 것으로 법무법인 화우는 분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넥스트 ESG 시대’에는 ESG 경영에 대한 제도적 틀이 해외에서부터 본격화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기업이 ESG를 경영 전반에 내재화함으로써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해 나가야 하는 ‘ESG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이 ESG 제도의 외풍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정책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대응 역량이 부족한 중견 및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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