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지 벌써 7개월째로 접어든다. 지금까지 이번 전쟁은 예상된 시나리오와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 초 미국이 러시아의 침략이 임박했다고 경고할 때만 해도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분석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러시아가 압도적인 군사력과 장비로 우크라이나군(軍)을 제압하고 수도 키이우를 곧장 함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과 민은 세계를 감동시킨 강력한 저항으로 수도를 지켜냈다. 미국 등 서방 주요국은 푸틴이 이번 전쟁을 수행하는 데 최대 걸림돌을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라고 꼽았다. 서방의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를 주도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시작되면 러시아 화폐 '루블(ruble)'이 'rubble(잔해)'로 변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루블화 가치는 원유 수출 증가에 힘입어 올해 들어 20% 이상이나 상승했다.
확전이냐 회담이냐
CNN 등 주요 서방 언론은 수세에 몰린 푸틴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나는 '총동원령'을 통한 확전이다. 또 하나는 협상을 통한 종전이다. 그러나 둘 다 현실적인 대응책은 아닌 듯하다. 총동원 명령을 내리자니 자신이 '특수 군사작전'으로 명명한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쟁임을 사실상 시인하는 셈이 된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치' 정권을 몰아낼 것이라는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같은 슬라브계 국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셈이 된다. '협상' 카드도 현재로선 유용하지 못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금까지 러시아에 점령당한 영토를 모두 수복하지 않으면 협상에 나설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푸틴과 통화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종전과 멀리 떨어져 있다(we are far away from the end of the war)고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반격 카드는 '에너지'다. 러시아가 올겨울 유럽에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한다면 '에너지 대란'은 불 보듯 뻔하다. 현재 우크라이나 동남부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자포리자 원전은 러시아군이 점령 중이다. 러시아는 서방과 전장 밖에서 사활을 걸고 '에너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유럽연합(EU) 27개국은 에너지 수요가 많아지는 겨울철인 오는 12월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엠바고(금수조치)에 들어간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7개국(G7)은 이 시기에 맞춰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한 가격상한제 도입을 예고하며 다른 국가들의 동참을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최대 버팀목인 원유 수익을 억제해 전쟁비용을 포함한 푸틴 정권의 주 수입원을 차단하고 고유가에도 대응하겠다는 의도다.
에너지가 전쟁의 최대 변수
서방 측 바람대로 유가 상한제가 제대로 가동된다면 러시아에는 큰 위협이다. 이에 푸틴은 초강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러시아 국영가스 회사 가스프롬은 애초 이번 달 3일 재개하려 했던 유럽행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을 틀어막았다. 푸틴은 유가 상한제에 참여하는 국가를 향해 "가스도 원유도 석탄도 휘발유도 아무것도 없다"고 경고했다. 그의 협박에 서방 측도 즉각 반격을 가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EU 회원국에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해서도 가격상한제 도입을 경고했다. 서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은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악화일로인 에너지 전쟁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변수라 할 수 있다.
예상을 뒤엎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경제는 서방의 가혹한 경제 제재를 잘 견뎌내며 '선전'했다. 지난 3월 러시아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과 금 가운데 절반가량인 3000억 달러가 동결됐다. 또 달러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에서 축출되었다. 하지만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서방 측 제재의 충격파는 미미했다. 특히 인도와 중국 등 제재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들이 러시아산 에너지를 적극 사들이면서 미국과 유럽 등 러시아산 원유 수출 차단 노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중·러 협력의 한계
지난 2월 시진핑 주석은 베이징 동계올림픽 현장에서 푸틴과 얼굴을 맞댄 뒤 미국과 서방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에 맞서 중·러 간 '무제한 협력'을 골자로 한 5000자 분량의 긴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올림픽 직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푸틴의 기대와는 달리 중국 측 지원은 소극적이었다.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무기 지원은 물론 러시아에 첨단 기술 수출을 금지하는 서방의 제재에 위반되는 행위는 피했다. 대신 교역과 경제 협력을 확대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축을 위한 파트너가 서방의 제재 여파로 경제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올해 1~8월 양국 간 교역은 1172억 달러로 지난해 동기 대비 31% 증가했다. 원자재 시장 데이터 서비스인 Kpler에 따르면 중국은 해상을 통해 올해 1~7월 러시아 우랄산 원유 수입을 지난해 동기 대비 40% 늘렸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파이프라인을 통한 대중국 가스 수출도 크게 늘렸다.
중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길을 가는 이유는 러시아 침공에 대한 공개적 지지로 인한 서방과 관계 파탄은 결국 중국의 이익과 배치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달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결정하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미국의 경제 제재나 유럽과 무역 마찰을 빚으면 중국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 경제 침체도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돕기엔 무리한 상황이다.
지난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개막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나란히 참석한 시진핑과 푸틴은 다시 한번 미국을 겨냥한 양국 간 연대를 다짐했다. 두 정상은 대만해협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상대 측 핵심 이익을 지지하고 에너지를 포함한 양국 간 교역을 강화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군사·안보 분야 협력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을 아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의 전면적 전략협력 관계는 산처럼 견고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은 양국 간 '무제한 협력'을 강조했던 지난 2월의 만남과 비교해 크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특히 푸틴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중국의 '의문과 우려(questions and concerns)'를 이해한다고 말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중국의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서방 측 제재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준비해온 듯하다. 세계 신용카드시장의 양대 산맥인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앙은행이 개발한 '미르(Mir) 신용카드 결제시스템' 덕분에 국내 결제시장에는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중국과 경제 협력이나 교역을 대폭 확대하고 국제 결제수단으로 위안화 사용도 크게 늘렸다. 중국 기업들은 서방 기업이 떠난 자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러시아로 몰려들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중국산 샤오미 스마트폰은 7월에 42%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한때 마켓 리더였던 삼성전자는 8.5%, 미국 애플은 7% 점유율에 불과했다. 삼성전자와 애플 점유율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50%에 육박했다. 러시아의 자동차 시장 분석기관인 오토스탯에 따르면 중국산 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울이 사상 최고치인 26%를 기록했다.
보이지 않는 종착점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서방의 강력한 제재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붕괴하고 그 결과 불만에 찬 국민들이 푸틴 축출에 나설 것으로 기대했다. 이달 초 언론 브리핑에서 드미트리 페스코브 크렘린 대변인은 올해 러시아 GDP 감소가 2%를 조금 웃돌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는 서방이 기대했던 재앙적 수준의 경제 몰락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오히려 러시아 경제는 유가와 생필품 폭등에 경기 침체 늪에 빠진 다수의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탄탄한 편이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 외환준비금 압류 등 자신이 주도한 강력한 서방 측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큰 악재다.
푸틴은 러시아가 과거 자랑하던 강력한 탱크부대와 공격형 헬기를 앞세워 단숨에 우크라이나 심장부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번 전쟁은 러시아의 재래식 전쟁 수행 역량에 대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면서 20년 넘게 러시아를 철권통치 중인 푸틴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냈다. 특히 미국이 지원한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등 최첨단 무기는 러시아군 후방 라인의 무기창고 등 병참 기지를 공격하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러시아는 최근 북한과 이란에서 로켓과 포탄 등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서방의 수출 통제로 무기 보급과 전투 지속 역량에 차질을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
개전 후 7개월에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나고,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로 남을지 아직은 종잡을 수 없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도 9·11 테러 이후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했다가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데 20년이나 더 걸렸다. 궁지에 몰린 푸틴이 전쟁의 국면을 바꿔 놓기 위해 화학무기나 전술핵 무기를 사용한다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3차 대전으로 확전될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1953년 종전 이후 초장기 대치 상태인 한반도와 유사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미니 박스]
지정학적 지진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전란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로 강대국 패권다툼의 희생양이 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처럼 열강 다툼에 '끼인 국가"에 살고 있는 나라들은 조그마한 외교적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지정학적 지진대에 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교훈 삼아 한·미 관계, 한·중 관계, 남북 관계, 한·일 관계, 한·러 관계에 대한 종합적이고 빈틈없는 외교 전략 마련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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