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이밖에 그를 마치 기다렸다는 듯 G20의 수장들 대부분 그와의 약식회담(a pull-aside meeting)을 갖기 위한 외교 쟁탈전을 벌여야만 했다. 15일 G20 정상회의 종료 후 그는 8개국 정상과의 약식회담 일정을 소화해야했다. 쉴틈 없는 일정에 그가 각 회담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약 30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중회담이 예외가 아닌 이유였다. 그리고 이튿날(16일) 저녁 시진핑은 유엔 사무총장과 이탈리아 총리를 만난 후 태국으로 출국했다. 다음날에도 그는 못 다한 회담을 이어나갔다. 여기에는 일본과의 정상회담도 포함됐다.
이 중 세계의 관심사는 단연 미국과의 정상회담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2021년 취임 이후 두 정상이 처음으로 대면 회담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간 두 정상은 화상회의만 1회, 영상통화 1회, 그리고 전화통화만 3회 가졌다. 총 5번 대화를 했지만 만남만 못하다는 것은 우리가 공감할 수 있겠다. 두 정상이 만나서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간절했는지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G20 정상회의가 개최되기 전날인 14일에 회담을 가졌다.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가진 시진핑의 약식회담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지난 3년간 회담국가와의 관계를 악화시킨 요인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했다. 불과 작년 7월만 하더라도 시진핑은 대만문제를 건드리면 ‘(미국의) 머리를 깨부순다’ ‘(미국이) 불에 타죽는다’ 등 강한 수사로 미국을 겁박했다. 그러나 이번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대만문제를 중국의 내정문제라며 이에 대한 미국의 존중을 ‘점잖게’ 요구했다. 그 이상의, 그 이하의 어떠한 발언도 가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의 약식회담에서도 시진핑은 사드를 암시하는 발언을 삼갔다. 예전의 정상회담뿐 아니라 장관급 회담에서 모든 중국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양국의 중대 관심 사항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것으로 회담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게재된 한·중 정상회담의 결과 내용에서 이와 같은 언급이 전혀 없었다. 중·일회담에서도 역시 지난 6월 현역 자위대를 정보관으로 대만대표부에 파견하는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에 중국 관영매체 사설은 일본의 행각을 도발이라며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릴 것’이라는 문구를 머리기사로 올렸다.
이처럼 중국이 지난 3년 동안 은둔생활하며 내뱉었던 과격한 발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런 연유에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중국의 국익에 중요한 나라들과 대척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담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면모는 그가 회담국과의 관계 회복과 대화, 그리고 협력을 강조한 데서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둘째 공통점은 관계 개선의 의사를 분명히 전한 데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궤도에 오를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국과도 분리할 수 없는 협력파트너로서 세계의 번영에서 중요한 책임이 있기에 중국과도 이런 국익 부분에서 광범위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략적 소통의 강화를 통해 ‘정치적 신뢰’를 쌓자고 전했다. 일본과의 관계도 그 중요성이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성의를 다해 서로 대하며 신뢰를 가지고 교류할 것을 요구했다. 중·일 양국이 서로 협력 파트너로 서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공통된 정치의식에서 정책 입안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일 양국이 상호존중하며 신뢰를 증진시키고 의구심을 희석시키며 이견이 있는 현안을 공동 관리할 것을 전했다.
이런 시진핑의 서두 발언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이 보였다. 우리에게 정치적 신뢰를 구축하자고 요구한 대목이다. 우리와의 역대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의식한 이유 때문에 우리와 ‘정치적’ 신뢰를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우리와의 정치적 신뢰를 발언한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문제를 ‘공동 관리(管控)’하자는 것은 미국에나 할 법한 발언이지만 일본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다. 물론 일본을 미국과 동격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일 양국이 당면한 도전과제가 미·중 양국의 것과 유사한 수준의 이해관계의 속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공통점은 소통과 협력을 강조한 점이다. 미국과 한국에 대해 시진핑은 경제현안의 ‘정치화(politicization)와 안보화(securitization)’를 피할 것을 유독 강조했다. 경제현안이 시진핑의 말대로 정치화, 안보화되는 순간 협력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전례 때문이다. 세계는 이와 같은 결과를 수없이 경험했다. 인류가 당면한 비군사적이고 비정치적인 분야에서의 위협 요소의 해결, 즉 이른바 ‘비전통안보’ 현안의 해답은 다국 간의 협력에 있다.
가령, 석유와 같은 전략물자의 안정된 공급 확보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석유야말로 비전통 안보분야에서 국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 중 하나다. 세계가 1970년대 초 ‘오일 쇼크’를 경험하면서 산유국은 석유를 무기화했고, 산유 수입국은 더 많은 물량 확보를 위해 평소에 강조한 이타적인 협력 태도에서 이기적으로 변했다. 석유가 민감한 국익문제이기 때문에 이의 확보문제는 정치화되고 안보화되었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석유에 대한 해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들 간의 한때 성행했던 ‘공동구매’의 꿈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이렇듯, 국익 현안이 비록 전통적인 안보요소가 아닐지언정 정치화, 안보화되는 순간 협력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 같은 역사적 교훈을 시진핑은 앞으로 미·중, 한·중 관계의 발전에 초석이 되어야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한 것이다.
시진핑의 약식회담에서 눈여겨볼 만한 다른 점도 풍성했다. 미국과의 회담에서 그는 미·중관계가 ‘제로섬’이 아닌 점을 누차 강조했다. 서로를 거울삼아 협심하여 같이 발전할 것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즉 ‘너 죽고 나 사는’ 식의 관계는 서로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잠식시킬 뿐 아니라 인류 발전에도 불행만 가져다줌을 상기시켰다. 그는 더 나아가 대만문제와 관련해서도 내정이라며 미·중 양국 간에 넘지 말아야 할 선임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대만의 독립문제와 대만해협의 안정문제가 물과 기름과 같이 분명히 차별되고 융합될 수 없는 속성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점과 관련하여 시진핑은 바이든 발언에 고무된 것 같아 보였다. 바이든이 시진핑에 전한 미국의 입장, 이른바 ‘4불(不)1무의(無意)’ 제안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미국이 중국에게 하지 않을 것 네 가지와 의도가 없는 한 가지를 뜻한 것이었다. 우선 미국이 중국의 체제를 존중하기 때문에 중국 체제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신냉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셋째, 반(反)중국을 위한 동맹관계를 강화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대만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과 충돌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충돌의 가능성으로 바이든은 중국과의 디커플링, 중국 경제발전의 훼방과 중국 포위의 결과를 예로 들었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특이점은 우리에 대한 인식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와의 정치적 신뢰를 강조한 사실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미·중 경쟁시대에 한·중관계의 발전 토대가 정치적 신뢰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를 중국이 앞으로 어느 정도 견지하느냐가 한·중관계의 결정적 요소라는 점을 자각한 결과다. 이런 발언으로 우리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전화되었다고 예단하기에는 이르겠다. 그러나 한·중 수교 30년을 맞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 최소한 한·중관계에서 제일 취약점을 인지하고 이를 개선할 의사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를 중국과 정치적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기회로 적극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의 약식회담 분위기에 도취되면 안 될 것이다. 외교는 외교에서 끝내야 한다. 외교의 장을 떠나는 순간 바깥 세상은 생존과 국익을 위한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미·중 양국 정상이 3시간 넘는 회담을 가지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회담 종료 불과 열흘 만에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25일 미국 내에서 중국 화웨이(華爲)와 중싱(中興, ZTE) 정보통신기업 제품의 수입과 판매 전면 금지를 선포했다. 미·중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현타’(현실자각타임)이 오는 순간이다.
우리 또한 이런 외교 현실을 보면서 자아도취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중국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 영화를 각각 한 편씩 상영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한한령’의 해제 조짐이 보이는 것으로 오판하면 안 된다. ‘한한령’에도 구체적인 기준과 항목이 있다. 이의 해제에서도 순서가 있다. 가령, 우리 방송의 수신 해제에서부터 우리 드라마의 방영은 물론 우리 연예인 출현의 광고 방송까지 허용돼야 한다. 한·중관계가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사사건건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때론 우리도 긴 호흡을 가지고 중국식 표현으로 ‘만만디(慢慢得, 천천히)’하게 한·중 양국관계를 견인하고 중국의 언행에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정도 ‘포커 페이스(poker face)’의 유지가 한·중관계에서는 필요하겠다.
주재우 필자 주요 이력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브루킹스연구소 방문연구원 ▷미국 조지아공과대학 Sam Nunn School of International Affairs Visiting Associate Profes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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