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녀온 베트남 여행도 그랬다. 덥고 습한 기후, 퍽 낯선 언어 속에 파묻혀 지낸 며칠이지만 그 여정의 끝에는 '설렘'이 있었다.
다낭을 기점으로 후에와 호이안을 둘러보는, 조금은 '뻔한' 일정이었지만 그 뻔한 여행마저 그리워하며 보냈던 3년이라는 세월은 이번 여정을 무척 새롭게 했고 또 행복하게 했다. 뻔하지만 '펀(fun)'했던 모처럼의 해외 나들이었다.
다낭은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여행지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하늘길이 열리고 베트남 정부가 입국 규제를 완화하자 다낭 여행상품을 예약하는 한국인 여행객이 빠른 속도로 증가(개방 직후 3000%대 증가)한 점만 봐도 얼마나 인기 있는 지역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다낭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경기도 다낭시'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식당은 기본이고 부동산, 법률사무소에 이르기까지 한글 간판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다낭은 역사적으로는 참파 왕국의 중요한 거점 지역이었다. 1858년 프랑스에 점령당한 시대에는 안남 왕국 내 프랑스 직할 식민구역이었고 월남전 당시 한국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참파왕국 유적인 미선 유적지와 오행산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다낭은 최근 해변을 중심으로 늘어선 고급 호텔·리조트와 바나힐로 주목받고 있다.
바나힐은 쯔엉선산맥 해발 1487m에 위치한 테마파크다. 프랑스 식민 시절,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의 습하고 더운 날씨를 피해 바나힐 꼭대기에 별장을 지어 휴양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프랑스인 통치에서 벗어난 후 방치돼 오던 바나힐은 베트남 정부 지원과 베트남 '선그룹' 투자를 통해 오늘날 바나힐로 재탄생했다.
바나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단연 '골든 브리지'다. 해발 1402m에 조성된 길이 150m인 다리를 거대한 손 두 개가 떠받치고 있다. 2018년 6월 개방된 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 덕에 인증사진 명소로 주목받았고 세계 최고 여행지 10선, 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다리 등에 이름을 올리며 유명세를 탔다.
골든 브리지 외에 19세기 프랑스 마을을 고스란히 재현한 프렌치 빌리지, 와이너리, 산악열차, 루지(알파인 코스터) 등 다양한 체험시설이 조성돼 있다. 구석구석을 찬찬히 둘러보고 놀이시설을 즐기려면 하루가 짧을 정도다.
다낭에서 30㎞ 정도 떨어진 남쪽에는 호이안이 있다. 베트남임에도 중국과 일본, 유럽식 건축양식이 한데 뒤섞인 퍽 이색적인 지역이다.
이곳은 16세기 중엽 이래 인도와 포르투갈,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 상선이 기항하며 무역도시로 번성했다. 일본인 마을이 생겨날 정도로 일본과도 교역이 잦았다. 그 흔적이 바로 '내원교'다.
내원교 외에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풍흥 고가와 쩐가 사당, 꾸언 탕가 등)들이 올드타운(구시가지)에 오롯이 남아 있다. 이에 유네스코는 1999년 호이안 올드타운에 대해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올드타운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호이안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저녁 무렵 하나둘 켜지는 투본강 소원배 등불 덕이리라.
마을 곳곳에 자리한 상점가에서 수공예품을 구경한 뒤 카페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투본강으로 나갔다. 강 위에 정박된 소원배가 하나둘 등에 불을 켜고 있었다.
너도나도 배에 몸을 싣는 것도 흥미로웠겠지만 다리 위에 서서 떠다니는 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낭만적이었다. 투본강 줄기를 따라 떠다니는 소원배 모습에 꽤 오랜 시간 마음을 빼앗겼으니 말이다. 캄캄한 밤하늘을 밝히는 등을 마주할 때는 마음이 몽글해지기까지 했다.
이 밖에 호이안에는 베트남 소수민족의 소중한 유산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 프랑스 사진작가 레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프레셔스 헤리티지 뮤지엄'이 있다. 올드타운과 안방 해변을 잇는 곳에 자리한 유기농 채소밭 '트라 꿰 채소마을'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채소마을에서는 마사지를 받고 유기농 식재료를 활용한 쿠킹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다.
후에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문화유적 도시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 같은 곳이다. 다낭에서 후에를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하이반 고개를 넘거나 하이반 터널을 이용하면 된다. 하이반 고개를 넘으면 정상 카페에 잠시 머물렀다 갈 수 있다. 장쾌하게 펼쳐지는 풍광, 커피 한 모금이 모처럼 나선 해외여행에 설렘을 더한다.
베트남 최후의 왕조 응우옌 왕조는 후에를 수도로 삼고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43년 동안 베트남을 통치했다. 이후 13대 왕 바오다이가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 선언으로 퇴위당하면서 결국 막을 내렸다.
'후에 성(황궁)'은 긴 역사를 지닌 왕궁인 만큼 중국식 건물과 프랑스식 성이 혼합돼 있다.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이곳의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됐다. 오랜 통치의 역사, 그 흔적은 전쟁 후 베트남 정부와 유네스코의 관심을 받았고, 1993년 '후에 기념물 복합지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중국 자금성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황제 거처인 후에 황궁 응오몬(정오의 문), 티엔무 사원과 뜨득왕릉, 카이딘 왕릉을 두루 둘러볼 수 있지만 유적지가 분산돼 있고, 복원 작업을 계속 진행 중이라 모든 곳을 다 보기는 어렵다.
응우옌 왕조 황제들은 자신이 묻힐 무덤을 꾸미는 데 힘을 쏟았다. 뜨득 황제는 4년 동안 군사 3000명을 동원해 자기 무덤을 만들었고, 카이딘 황제는 11년 동안 무덤(카이딘 황제릉)을 만들면서 국고를 탕진했다고.
그중 카이딘 황제릉을 둘러봤다. 프랑스 식민 통치 영향으로 유럽 건축 양식이 많이 가미됐다는 점에서 중국식을 본뜬 여타 황제릉과 구별됐다.
황제의 무덤이 위치한 계성전에는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 등신상이 있었다. 황제의 유골은 이 동상 아래 지하 18m 깊이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향 마을 '투이 쉬안 인센스 빌리지'에도 잠시 들렀다. 이곳에서 과거 왕조 시대 고위 신하들과 왕실에 향과 유향을 제공해왔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나는 향이나 유향과 달리 이 마을 인센스는 천연 재료를 사용한다. 형형색색 인센스 제조 체험도 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만큼, 아니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 베트남. 천 년 가까이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많은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던 곳. 상처를 품고 오랜 세월 견딘 베트남의 역사가 낯설지 않은 이유다.
많은 이가 다시 해외로 떠나는 시기다. 감염병 확산을 넘어 고물가에 고환율까지 우리 삶을 옥죄는 장애물들이 도처에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같을 것이다. 퍽퍽한 우리네 인생이 여행을 통해 조금은 달콤해지기를. 그래서 힘겨운 삶을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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