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폐허는 성찰을 부르는 힘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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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2-12-1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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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 어느 날 최북단 마지막 기차역이라는 철원 월정리역을 찾았다.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는지라 출입절차를 미리 밟아야 했다. 지난 여름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조선시대 4대 문장가. 전서 글씨체 대가)선생의 무덤을 찾았을 때 민통선 통과의례를 치른 바 있으니 DMZ방문은 올해 두 번째다. 붐비는 여느 관광명소와는 달리 한적한 미답지가 주는 허허로움과 함께 폐허의 처연함이 주는 또 다른 미학이 일행을 맞이한다.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소리를 울렸던 인민군 화물열차와 객차 일부라고 했다. 육이오 때 유엔군의 폭격을 받아 탈선된 열차는 버려졌고 증기기관차는 포연 속에서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70년이라는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더불어 그 위로 눈·비·바람도 그만큼 지나갔다. 잔해는 포탄과 총탄 자국을 안고서 전쟁의 상흔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철로 위에 주저앉은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는지 객차로서 자기 모습조차 포기한 채 그냥 널부러져 있다. 45도쯤 기울어진 녹슨 바퀴 때문에 ‘기차가 맞구나’하는 생각이 들 뿐, 전체적으로는 길게 쌓아놓은 고철더미처럼 보인다. 고철열차라도 남쪽으로 끌고 가려는지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생뚱맞은 모습으로 선로 끝에 서있다.
 

[철원 월정리역 기차 잔해]


본래 서울 용산에서 동해안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철도였다. 철로는 1914년 개통했고 월정리 역은 1934년 신축했다. 건물은 전쟁으로 소실됐고 1988년 복원했다. 본래 역사(驛舍)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까닭에 남쪽으로 1㎞쯤 옮긴 위치였다. 한문으로 쓰여진 ‘月井里驛(월정리역)’이 당시의 문자표기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근 철원역은 직원 80여 명이 근무할 만큼 규모있는 역이었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당시 인구가 10만명가량 되는 대도시이며, 금강산 가는 전기철도의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절 궁예왕이 태봉국의 도성으로 삼을 만큼 넓은 평야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오대쌀’을 생산하는 평야는 3분의 1 정도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그 나머지는 모두 비무장지대 너머 북쪽이다. 남북으로 통하던 철로는 폐기된 상태이며 역 경내에 전시용 철로를 백미터 정도 관광용으로 복원해 둔 정도다. 오늘도 표지판은 ‘鐵馬(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구호를 열차를 대신하여 외치고 있다.
 

[월정리역 이정표]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군사적인 이유뿐만 아니다. 2018년 안보관광지로 개방된 이후에도 아프리카돼지열병 그리고 조류독감 또는 코로나19 등으로 인하여 수시로 막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군사보호지역을 설정해 둔 덕분에 두루미 등 많은 종류의 날짐승과 각종 길짐승에게는 더없이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양면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민통선 안의 별천지를 빠져 나오니 또 다른 전쟁유물인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 기다리고 있다. 1946년 건립한 560평 지상 3층의 러시아식 공법의 건물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사용했다. 좌우 대칭적인 평면과 함께 비례가 정돈된 입면(立面)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것 등이 합해지면서 권위적인 느낌을 더했다. 현재 2층과 3층은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무너진 상태로 골격만 남았다. 수많은 포탄자국 총탄자국 속에서도 뼈대가 남아있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임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현재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앞쪽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지만 옆쪽과 뒤쪽은 수많은 철근 지지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철원 노동당사]


언젠가 찾았던 일본 히로시마 ‘원폭 돔(겐바쿠 도무)’을 생각나게 한다. 체코 출신 건축가가 설계했고 1915년에 지어진 지상 3층 벽돌 건물이다. 1945년 8월 6일 원폭투하에도 중앙돔과 외벽 일부가 살아남았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풍화를 막기 위한 정기적 보수공사는 새 건물 관리비를 능가한다고 들었다. 불편한 전쟁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철원 노동당사와 일부분 닮았다고 하겠다. 노동당사는 근대문화유산 22호로 지정되었다. 70년 동안 풍우에 노출되면서 콘크리트 등이 부식되자 보수를 했고 또 벽체의 보존처리와 함께 외벽탈락 방지를 위한 공사가 뒤따랐다. 2022년 5월 야간 조명시설까지 갖추면서 일몰 후 찾아오는 관광객까지 배려했다.
 
이 지역도 1990년대 이전까지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이었다. 그 규제가 완화되면서 비로소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있는 이 건축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유명한 뮤지션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뮤직비디오 ‘발해를 꿈꾸며’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kbs 열린음악회 등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문화행사의 무대로 활용되면서 지금은 모두에게 친숙한 장소가 된 것이다. 무엇이건 익숙하면 편안해진다. 불편했던 그 건물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이 합작한 전위예술 작품인 월정리역 기차 잔해와 노동당사 건물에서 폐허미가 주는 비장함을 만났다. 그것은 전쟁으로 파괴된 인공적 폐허이자 자연에 의해 낡아가는 자연적 폐허가 겹치면서 또 다른 미학적인 완성을 향해가는 진행형 ‘노천 예술’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온전했던 모습보다는 현재의 상실과 소멸이 더 강하게 소환될 수밖에 없다.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거기에 부여한 의미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폐허는 성찰을 부르는 힘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두 전쟁 유물 앞에서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라는 ‘공(空)의 이치’를 다시금 음미하게 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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