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동구에 사는 김모씨(52)는 최근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이사를 계획하던 중 집주인에게 '역월세' 제안을 받았다. 전셋값이 크게 하락해 보증금을 당장 빼 줄 돈이 없으니 대신 그 차액만큼 대출이자를 대신 부담하겠다는 것이다.
김씨는 "부동산 중개업소나 관련 커뮤니티를 찾아보니 최근 이런 사례가 꽤 있다고 하더라"면서 "집주인 제안을 따를지, 보증금을 받은 뒤 전세보증금이 더 낮은 집을 찾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값 하락으로 전셋값이 동반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시장에 역전세난이 심화하고 있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돈을 주는 역월세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전셋값이 하락하면서 고점에 계약을 맺은 집주인이 차액을 반환하지 못해 생기는 현상이다.
최근 전셋값 하락은 매우 가파르다. 14일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지난 1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은 51.96%로 2012년 5월(51.9%) 이후 10여 년 만에 가장 낮았다.
지난해 7월(54.7%)과 비교하면 반년 만에 2.74%포인트 떨어진 것이며 전셋값이 집값보다 더욱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강동구 상일동 '고덕자이' 전용 59㎡ 매물은 갱신이긴 하지만 최근 5억원에 전세 계약을 맺었다. 이전 전세금 7억원에서 2억원 하락한 것이다. 동작구 흑석한강푸르지오(84㎡)는 지난달 5억7000만원에 전세 계약이 체결됐는데 2021년 10월(11억5000만원) 계약과 비교하면 보증금이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노원구 ‘상계주공 6단지’(58㎡)도 2021년 2월 2억8000만원에서 지난달 2억4000만원으로 4000만원 낮은 가격에 전세 계약이 신고됐다.
전셋값 하락이 본격화하면서 부동산 시장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전세시장이 세입자 우위로 재편되면서 세입자가 집주인을 면접 보듯 심사하는가 하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대출이자를 월세처럼 지급하거나 인테리어를 새로 해주는 사례도 있다. 집주인들이 갱신계약을 하기 위해 은행 등에서 전세퇴거자금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돌려주는 사례도 있다고 현장 공인중개업소들은 전한다.
강동구 상일동 A중개업소 대표는 “최근 전세금이 내려가면서 세입자들이 갱신 청구권을 쓰지 않고 나가겠다고 말해 애를 먹은 집주인들이 꽤 있었다”며 “그래서 집주인들이 전세금이 2억원 정도 차이 나면 1억원은 대출을 통해 갚고 나머지 1억원은 이자를 쳐서 나중에 주는 방식 등으로 세입자를 붙잡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남구 개포동 중개업소 대표는 "역월세 사례가 종종 있다. 차액을 못 돌려줄 때는 세입자와 집주인이 협의해서 집주인이 매달 대출이자를 대신 내주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는 세입자가 크게 줄었다. 부동산 중개업체 집토스가 수도권 주택을 대상으로 국토교통부 전월세 실거래가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2월 갱신요구권을 사용한 갱신계약 건수가 역대 최저치인 6574건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갱신계약 중 36% 수준으로 전년 동월과 비교하면 47% 감소했다.
역전세난이 심화하면서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워진 데다 전셋값이 떨어지면서 갱신요구권을 사용하는 세입자가 줄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갱신 계약을 하더라도 전셋값을 낮춘 감액 계약이 상당수다. 지난해 12월 수도권 아파트에서 갱신요구권을 사용한 계약 중 종전보다 임대료를 감액한 계약은 1481건이었다. 이는 전년 동월(76건) 대비 19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최소 2년 동안 집값과 함께 전셋값이 더 하락할 가능성이 큰 만큼 역전세난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양지영 양지영R&C연구소장은 “고금리로 인한 전세대출 부담이 있고 집값이 내려가는 상황에서 전세 수요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며 “올해 입주 물량까지 더해지면 당분간 전셋값 하락으로 인한 역전세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윤지해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단기간 급등했던 전셋값이 전세계약 만기를 앞두고 되돌림하는 상황”이라면서 "월세 시장으로 수요 이탈, 여전한 전셋값에 대한 부담감, 많은 입주 물량까지 예정된 곳은 앞으로도 가격 하락이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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