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내가 주인이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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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건설노동자
입력 2023-03-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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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건설노동자]


3월 초는 겨울이 끝나고 봄이라고 하지만 따뜻함을 느끼기에는 좀 음습한 시기다. 그래서 겨울 옷을 입어야 할지 봄 옷을 입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이것을 의사결정장애라고 핀잔을 줄 수 있겠지만 자칫 가볍게 옷을 입었다가는 꽃샘추위로 감기에 들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시기를 春來不似春이라고 하는 거 같다. 자기독립성을 갖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
3월은 3·1절로 시작한다. 104년 전 우리 선조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즉, 자기의 처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 여기서 독립은 망한 대한제국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 민주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약 200만명이며 7509명이 사망, 1만5850명이 부상, 4만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곳, 학교가 2곳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106만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만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식기록으로만 봐도 당시 만세 운동 참가자는 당시 조선 인구의 6.31%에 달하는 것으로, 이것은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도 영향을 끼친 인류사에 남을 문명사적 운동이었다. 참여 인원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 운동의 성격이 비폭력저항운동이라는 이제까지 인류사에 없던 새로운 저항운동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비폭력저항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계몽주의의 중심 이론인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으로, 인종차별주의적 정치 또는 행동의 근거가 되어 제국주의에 이용되었다. 이러한 냉혹하고 엄중한 시대에 자본과 군대라는 무자비한 권력 앞에 비폭력적 저항은 존엄한 가치를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다. 그것이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민족적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당시 세계에도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망명정부가 여기저기서 세워졌고 중국과 인도 등 세계에는 이와 유사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의미한다. 당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도 공화제가 아닌데 왕정이라는 체제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이 시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만들겠다니, 당시 시민의식이 어떻게 그리 빨리 진척이 되었을까.
기독교와 민족교육
아무리 조선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왕정임에는 틀림없고 조선 후기로 오면 왕권은 무너지고 3정의 문란은 극에 달해 나라를 운영할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당시 국민을 계몽하고 시민의식을 갖게 하는 데 기독교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생각한다.
한국기독교의 선교사는 기독교 선교사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주적이었다. 선교사가 파송되어 기독교를 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이 해외에 나가 책을 먼저 연구하면서 자발적 신자가 생겨나고 자발적인 예배가 시작되어 선교사를 초빙하면서 선교된 나라다. 이렇게 가톨릭이 먼저 들어와 국민 의식의 변화를 이끌다가 엄청난 핍박으로 잠잠하던 시기, 개신교가 들어와 학교와 병원 등 신학문 운동을 일으키며 빠르게 선교의 영역을 넓혔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로부터 존엄이 부여되었다고 하는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싹텄다. 이들이 하는 강연 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인권과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중에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글성경이 나오면서 국민적 교육은 더 널리 깊게 진행되었다. 한글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 찬 해였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음은 두말할 것이 없다.
일례로, 1907년 1월 2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방위량(邦緯良)’이란 우리 이름을 가진 미국의 블레어(Blair) 선교사의 주관으로 성경 강의를 하는 사경회를 열었는데 매일 저녁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약 1천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짧게는 16㎞, 길면 160㎞에 이르는 아주 먼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2주간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주 고된 일이었지만 미국의 선교사가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야기와 서양 문물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주민들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부흥으로 당시 백성들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 일대의 학교는 단순히 목회 및 전도자의 양성에 국한되지 않았고,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갈 지도자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조만식, 안창호 등은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 기독교를 기반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싸움’, 3·1운동 당시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 돌아간 선교사는 100여년 전 우리의 독립만세운동을 이렇게 칭했다. 1919년 미국에서 한 해 등장한 한국관련 기사를 월별로 살펴보면 1~2월 3건에 불과했다가 3월에만 112건이 나온다. 4월 97건을 포함하면 두 달간 209건. 이해 나온 402건 중 절반 넘는 기사가 3월과 4월에 집중적으로 보도된 것이다.
미국 신문 속에 한국의 독립을 전하는 소식이 3·1운동을 계기로 급증한 셈이다. '역사상 가장 평화적인 저항운동'이라고 불렀던 3·1운동은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100년 전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닿았다. 워싱턴뿐 아니라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버지니아, 애리조나, 몬태나 등 미국 방방곡곡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로소 미국에서도 한국(KOREA)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3·1운동의 의미는 전국이 들고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일본에 독립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다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이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반만년 역사를 가진 독립국이었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국민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 한국의 상황과 한국인들의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된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제국주의론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동경에서 학생들이 일으킨 2·8독립선언이었고, 2·8 독립선언은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피식민지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윌슨 대통령에게 자결 원리는 바로 민주적인 국가 성립의 필수 조건이었으며, 이는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초석이었다. 즉 모든 국가가 피치자의 동의에 의해 성립될 때만 이러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자결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평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민족의 자결을 직접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명문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 ‘자결’을 민족의 자결로 해석하고 전유했다. 전시에 그가 한 연설과 주장, 즉 승리 없는 평화와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국제연맹 창설의 제안은 패전국으로 하여금 공정한 평화 협상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였으며 억압받는 전 세계 피식민지인들에게는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이라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게 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 직후 발표된 레닌의 선언들에 대항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레닌은 “혁명에 의한 제국주의 국가 타도만이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며,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윌슨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타협과 양보에 의해 식민지 문제를 점진적, 평화적 해결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슨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영향이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미치는 것을 차단시키려고 한 측면도 있다.
레닌은 자신의 제국주의 이론을 통하여 제국주의는 소수의 선진국들이 엄청난 다수의 주민들에게 식민지적 억압과 금융적 교살을 자행하는 세계적 체제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자본 수출은 후진국과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격렬한 민중적 저항을 초래함으로써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있다는 점 등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런 제국주의 이론에 근거하여 레닌의 민족자결권 옹호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의 정세는 레닌의 예측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아시아지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아시아 지역의 민족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자 레닌은 아시아 민족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독립운동은 두 개의 방향으로 나뉘게 되었고 결국에는 해방이 되어서도 두 개의 정부를 갖게 되었다.  
당시 독립지사들의 독립운동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정부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기에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된다면 그 과정이 사회주의든 기독교이든 상관이 없었다. 독립 후에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이 없었기에 이것이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공산주의는 망했고 미국식 자본주의는 부패했다. 지금도 패권적인 경쟁구도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때에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의 독립선언
독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해방과 광복의 의미와는 어떻게 다른가. 명지대 진태하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독립이란 용어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같이 신생국이 다른 나라로부터 처음으로 자립하게 되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며, 광복이란 용어는 종전에 독립국이었던 나라가 일시 주권을 강탈당하였다가 끈질긴 항거로 되찾은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구한 독립국이던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35년간 주권을 일시 강탈당했다가 다시 찾은 것은 광복이라고 해야지 독립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북한의 조국해방기념일과 같이 해방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해방은 타동사로서 해방되다 또는 해방된 날 하면 능동의 의미보다 피동의 의미가 강조되어 우리 선조들이 적극적인 항거와 투쟁의 결과 광복이 된 의미를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용어는 매우 중요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용어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 시대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의 초점을 나에게 돌려보는 것이다. 민주 공화국의 시민인 나는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독립이어야 하는가. 나라를 다시 찾았으니 광복이고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으니 해방이다. 그 주어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 술어 바뀌듯이 나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광복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나의 삶의 주인(아주, 我主)이라고 만세를 불러보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탁월해지는 것이다. 나의 함량을 높이는 것이다. 나의 함량을 높인다는 것은 사람의 격을 높이는 것이다. 사람의 격을 높인다는 것은 지적인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지적인 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차원을 높이는 것이다. 차원 높은 시선을 갖는 것이다.
내가 탁월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자기 건강도 지켜야 한다. 자기관리를 할 줄 아는 것이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며,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멋진 몸매를 갖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열심히 운동하고 자기 단련을 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은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라 '나'를 중시하는 것이다. 나의 고유함, 개성진리체라고 하는, 이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고유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두가 같이하는 유행을 따르지 않으며, 전체 습관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왕따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괴짜라거나 황당하다라는 소릴 들어도 자기의 고유한 특질을 사랑하며 크게 키워나가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슈가 되는 것이고, 임제선사가 말하는 수처작주 하는 것이다. 내가 메시아가 되는 것이고,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며 내가 군자가 되는 것이다. 대붕의 꿈을 꾸는 것이다.


 

[그림설명 = 독립, 홀로 선다는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다. 인드라망 우주 속에서 나의 고유함이 영롱하게 빛나는 사람이다. 내가 나다울 때 우리는 화려하게 빛날 수 있다. 우리 사회도, 우리 나라도.]


 



필자 소개 - 이두수 작가는 수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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