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대통령실이 요즘 시끄럽다. 김일범 의전비서관, 이문희 외교비서관 사퇴에 이어 대통령실의 외교와 안보 정책 최고 책임자인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29일 전격 사퇴했다. 이는 김 실장의 사퇴로 끝나지 않았다. 주미대사, 외교1차관 후속 인사로 이어졌다. 이른바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 보고 누락 사건,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설 등 ‘3·16 한·일정상회담’후폭풍까지 이번 용산 외교안보 라인 인사 참사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김 실장이 사퇴했지만 그 배경을 둘러싼 설화는 쉽사리 잦아들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은 후임자로 조태용 주미대사까지 속전속결로 임명했지만, 예고된 '경질성 인사'란 게 정치외교권의 중론이다.
문제는 이번 '김성한 사퇴'가 내달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訪美)를 앞두고 외교안보라인 '인적 쇄신'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에서 지펴진 불씨는 외교안보 관련 부처로 옮겨질 공산이 커 보인다.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30일 아주경제와의 통화에서 "(김성한 사퇴는) 100% 경질성 인사다"라며 "대일 외교 후속 조치와 방미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안보실장) 교체는 어려운 일인데, 경질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김성한 '경질성 인사' 논란에...대통령실 "인사 순환 차원" 선 긋기
경질성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은 '인사 순환 차원'의 자연스러운 교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3월 한·일, 4월 한·미, 5월 한·미·일 정상회담(G7정상회의 계기 전망) 등 굵직한 외교 일정을 앞둔 상황에서 의아한 조치란 시선이 지배적이다.
특히 최대 기폭제는 이른바 '블랙핑크' 보고 누락사건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 실장이 이달 초 3박5일 일정으로 방미, 워싱턴에서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 일정을 조율했다. 미국 쪽 제안을 받아 K-팝 그룹 블랙핑크와 미국 가수 레이디 가가의 합동 공연 일정을 조율했는데, 이 과정에서 안보실 실무진은 여러 차례 보고를 누락해 윤 대통령과 백악관의 불신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김건희 여사가 참석하는 여성 관련 행사도 보고를 누락, 윤 대통령이 김 실장을 호되게 질책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내부투쟁설도 김 실장 사퇴에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외교가에서는 이미 김 실장과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의 알력과 갈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지난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해법 발표와 한·일정상회담 의제 등 한·일 관계를 두고 갈등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통령실 주변에서는 김 차장이 김 실장보다 실세라는 말도 들린다.
두 사람은 2000년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있을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췄다. 이명박(MB) 정부 시절에는 김 차장은 청와대 기획관으로 당시 외교안보 정책을 사실상 총괄했고, 김 실장은 외교부 차관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현 정부에서 관계가 역전됐는데 그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다는 관측이다. 익명을 요구한 K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두 사람의 갈등설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면서 "MB정부에선 김 차장이 청와대 핵심이었고, 김 실장은 아래 격이었으니 지금 정부에선 관계가 좋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안보실 역량과 관련해 누적됐던 문제도 윤 대통령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역대 대통령들은 해외 순방을 다녀오면 보통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윤 대통령의 경우 '순방 리스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지율에 악영향을 줬다.
여야, 김성한 사퇴 배경 두고 공방전...尹, 한일정상회담 여진도 부담
김 실장 사퇴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전도 이어졌다. 민주당은 대통령실 참모진 간 갈등설을 제기하며 '외교안보 라인'에 숨은 권력이 있는지 의혹을 제기했고, 국민의힘은 '갈등설은 설에 불과하다'며 진화에 나섰다. '블랙핑크' 보고 누락 이슈에 대해선 "그게 진짜 (김 실장 경질의) 이유라면 전 세계 웃음거리"라는 야권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당 정책조정회의에서 "다음 달에 있을 방미를 앞두고 밤새워 전략을 짜도 모자랄 대통령실이 대책은 고사하고 온갖 풍문의 진원지가 됐다"며 "증폭되는 국민 우려를 깨끗이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은 명백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밝혔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인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블랙핑크와 레이디가가 때문에 한 나라의 안보실장을 교체했다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다"고 꼬집었다.
여당은 갈등성 진화에 땀을 흘렸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갑작스러운 교체긴 하지만 윤 대통령께서 읍참마속 심정으로 인사 결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도 라디오에 출연해 "갈등이 있었다는 등 그런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한·일정상회담 여진이 계속되는 점도 윤 대통령으로선 '외교 리스크'다. 특히 지난 16일 도쿄 회담에서 일본 측이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제한 철폐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난감해졌다. 대통령실은 이날 오전 대변인실 명의로 "후쿠시마산 수산물이 국내로 들어올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언론 공지했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 관련, 국민 건강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정부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다.
대통령실 공지는 야당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한·일정상회담 국정조사 요구서를 제출한 것에 대응하는 성격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날 본회의에 보고된 국조 요구서 속 조사 대상에는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제한 해제 요구 여부도 포함됐다.
대통령실의 반박에도 불구, 정치권에서는 한·일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여야가 대립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날 민주당 등 야당의 '한일정상회담 진상규명' 국정조사 추진에 대해 정상외교는 국정조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하면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 방탄용'이라고 비판했다.
대통령실의 외교·안보 라인 교체는 관련 부처 고위급 인사로 이어질 전망이다. 주요국과의 양자관계 조율을 맡는 외교 1차관 자리가 비면서 당장 추가 인선이 필요해졌다. 대일 외교에 있어서도 윤 대통령이 강조한 한일정상회담 후속 조치를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다.
전면적인 내각 외교·안보 진용의 개편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시각도 있다. 정치인 출신인 박진 외교부 장관, 권영세 통일부 장관의 경우 내년 총선 출마 가능성이 계속해서 제기돼 왔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권 장관은 당의 중요 자산이라 내년 총선에 나와주길 바란다"며 "그에 따른 장관 인사도 대통령으로선 고민이긴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 김승겸 합참의장 등 작년 말 북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 당시 부실 대응으로 질타받은 군 수뇌부에 대한 쇄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4월 말 국빈 방미, 5월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및 한·미·일 정상회담 등 중요 정상외교 이전에 개편이 '속전속결'로 이뤄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줄줄이 이어지는 정상외교 일정을 의식하면 인사를 할 수가 없다"며 "정리할 부분은 빨리 정리하고 안정적인 기반에서 외교와 국정이 진행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역시 한·미정상회담 준비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정상회담 차질 우려에 대해 "이미 국빈방미에 대해서는 상당 기간 긴밀한 협력체제를 유지하면서 협의해오고 있다"며 "외교부가 사람이 아닌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주요 행사도 원만하게 준비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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