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아주경제신문사 사무실은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서 소리치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필자도 지난 15년 동안 이 부근에서 일하면서 '평화의 소녀상'으로 불리는 일본 위안부 문제의 상징물, 그리고 매주 수요일 점심 시간에 이곳에서 열리는 집회에 대해 꽤 익숙해 있다.
그동안 나에겐 수수께기 같은 세 가지 질문이 생겼다. 첫 번째는 이 지역에 있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왜 집회 참가 시위대의 소음을 그대로 참고 있을까라는 의문이다. 특히 지난 2~3년간은 반대 집회까지 등장하면서 주변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경찰이 이러한 집회를 금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민 민원 제기다. 그런데 왜 이곳의 사람들은 불평을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질문은 한국과 일본 당국이 소녀상을 그대로 묵인하고 있는 이유다.
세 번째는 아직 생존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도 인권 운동가들이 위안부 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할 것인가 여부다. 이 세 번째 질문은 냉소적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엔 많은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위안부 피해자 대부분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들인 반면 인권 운동가들이 돌보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관측에서 비롯된다. 과연 그들이 수용할 만한 화해는 이뤄질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더 자세히 애기해 보자. 이러한 질문들이 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필자의 공감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며 독자들에게 먼저 이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소개한다.
며칠 전 퇴근길 교통 체증으로 나는 동상 바로 옆에 멈춰 섰다. 스카프를 착용한 소녀상은 경찰에 의해 잘 보호되고 있다. 바리케이드 곁에는 근무 중인 젊은 경찰 두 명이 보였다. 당국은 마치 그녀가 공격이나 폭행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낮은 바리케이드 뒤편에 밤새 앉아 있는 청년도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옆에 다가가 멈출 때 그는 머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숙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들이 돌보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다시는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기도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봤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소음이 일주일에 한두 시간만 지속되기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라는 특정 이슈와 더불어 보다 광범위한 맥락에서 깊이 있게 생각을 해보면 집회를 하는 좋은 명분이 있다. 이 문제는 어린 소녀 시절 최전선으로 징집된 군인들의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을 요구한다. 더 넓은 맥락이란 지난 세기 일본의 다소 불쾌하고 부당한 35년에 걸친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다.
불평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더 깊고 의미 있는 것을 위해 흥분하는 일이다. 이곳 직장인이 불평을 늘어 놓으려면 그들에게 어필하는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반대집회 시위자들은 위안부 문제가 특정 인권단체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조작되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직장인들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다.
당국이 소녀상을 묵인하는 이유에 대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해 필자는 소녀상이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 영구적으로 고정된 일종의 공연 설치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현재 대사관 건물 부지는 공터이고 대사관은 인근 건물에 입주해 있다) 이는 그 자체가 매우 이례적으로 소녀상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분명히 대사관 주변에서 이런저런 각종 시위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주재국 경찰의 보호를 받는 영구적인 시설이 있는 대사관이 전 세계 어느 곳에 또 있을지 필자는 모르겠다. 이는 외교적 법칙상 허용되지 않는다. 일본이 여전히 아시아를 침략하고 위안부들을 모은다고 해도 미국이나 중국이 외교의 룰을 깰지 의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왜 그럴까?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잘못된' 학술 연구를 범죄시하려는 기도와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곳에서 위안부를 모집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 한국 자체도 수십 년 동안 매춘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40년 후 외국인(실제로는 일본인)이 와서 소송을 제기할 때까지 피해자로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또 다른 골칫거리는 1965년 일제강점기에 대한 배상을 받아들인 사실이다. 배상금이 개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총체적 국가 발전을 위해 사용된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태평양전쟁 전의 일본을 지지하거나 위안부 피해자를 적대시하는 사람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계속해서 일본을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것이 정부의 입장에서 불리하지 않을 수 있다.
세 번째 질문, 즉 위안부 논란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라는 냉소적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고민 속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지난주 찰스 왕이 영국 왕실과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연구하는 작업에 지지를 보였다는 뉴스는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찰스 왕은 영국 왕실이 배상금 지불에 대한 요청을 받으면 기꺼이 응할 것으로 보인다. 노예무역에 대한 배상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는 카리브해와 미국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다. 보상과 관련해 노예무역 피해자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 필요는 없다. 사건이 발생한 후 몇 세대가 지났다 해도 가해자 역할인이 피해자 역할인에게 보상을 해도 역사적 정의는 성립되는 것이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가 늦더라도 종결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국 운동가들은 문제 해결보다는 대의에 더 신경을 쓰며 문제를 계속해서 이어가려고 한다는 냉소적 견해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맴돌 것이다.
[필자 약력]
마이클 브린은 현재 글로벌 PR 컨설팅 회사인 인사이트 커뮤니케이션스 CEO다. '가디언' '더 타임스' 한국 주재 특파원, 북한 기업에 자문을 제공하는 컨설턴트, 주한 외신기자클럽 대표를 역임했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한국인을 말한다>를 포함해 한국 관련 저서 네 권을 집필했다. 1982년 처음 한국에 왔으며 서울에서 40년 가까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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