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제왕학] 난세가 영웅을 부르고, 영웅이 난세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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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논설고문
입력 2023-04-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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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차르 푸틴 - 소련의 '무명 스파이'에서 러시아 2인자로

[박종렬 논설고문]


난세(亂世)에 ‘위기는 기회’, 새 인물 탄생 대망(待望)

‘난세가 영웅을 부르고, 영웅이 난세를 부른다’고 했던가? 천하가 혼란에 빠지면 힘 있는 사람에게 적당히 빌붙어 생존해야 한다. 그야말로 ‘십 리도 못 가는 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간다’는 부기미(附驥尾) 전술이다. 푸틴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전 60여 년 지속괸 냉전 시대가 종식되며 소련은 그야말로 ‘천하대란(天下大亂)’ 시대가 열린다. ‘무명의 스파이’ 출신인 푸틴은 ‘천리마’에 비견되는 옐친 대통령의 ‘총리’ 발탁으로 러시아에서 ‘영웅’으로 부각될 기회를 얻게 된다.

소련 붕괴 당시 대통령인 고르바초프(1931.3.2.~2022.8.30, 1985~1991 재임)는 1985년 소련의 8번째 지도자로 54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침체된 경제 회복과 정치적 민주화를 허용하고, 경제 효율성을 제고하려 분투했다. 미국에 맞선 공산 진영의 대표였던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의 비능률적이고 불합리한 국가시스템의 ‘제도 피로화’ 현상 타파를 적극 추진한 것이다. 6년여 페레스트로이카(재건과 구조조정)와 글라스노스트(개방과 언론의 자유)로 상징된 일련의 개혁‧개방 정책, 즉 언론 통제와 적대적 대외 관계 형성 등을 완화하는 적폐 청산을 위한 개혁을 주도했다. 누적된 모순의 급진적 개혁은 공산당 보수파의 불만을 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비용 문제에 더해 1980년대 후반 유가 하락, 사상자 수만 명을 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1986년)까지 겹쳐 심각한 리더십 위기를 결과했다. 그는 당 정치국 압력을 피해 보려 1990년에 ‘서기장’ 대신 대통령직을 신설해 개혁 지도자로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권력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91년 8월 18일 밤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국방·내무부의 공산당 보수 강경파들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구성해 흑해 크림반도 별장에서 휴가 중이던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사임을 요구했다. 이 제안을 거부하는 그를 쿠데타 세력이 연금하고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부총리급 국무위원으로 모스크바시 지구당 제1서기(서울시장 권한대행에 해당) 옐친(1931.2.1~2007.4.23, 1991~1999 대통령 재임)은 쿠데타군이 모스크바를 장악하면 임시정부를 조직해 진압할 계획까지 세워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가난한 농촌 출신인 옐친은 우랄대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젊은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한 그는 자신보다 4주 먼저 태어난 고르바초프가 최고 지도자에 오르면서 중용돼 1976년 스베르들롭스크주 지구당 제1서기를 거처 1981년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시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옐친 도움으로 사흘 만에 쿠데타를 제압했지만 실질적 권력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진 옐친 등에게 넘어갔다.

쿠데타 진압으로 ‘민주화의 영웅’이 된 옐친은 이후 소련 정부를 완전히 무력화시킨 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도자와 함께 소비에트연방 해체를 결정한다. 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얻은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 연방’이라는 새로운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을 선언하고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을 이끄는 최고 권력자가 됐다. 체제 전환이라는 정치적 격변기였던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푸틴은 쿠데타 반대파인 옐친의 정치적 동지로 자신의 대학 은사인 솝차크 편에 선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포착한 푸틴은 기회주의자답게 ‘권력 이동’이라는 시대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푸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총리 발탁

소련 붕괴 후 ‘초대 대통령’이 된 옐친의 개혁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면서 KGB가 해체돼 ‘실직자’가 된 푸틴은 대학 은사인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솝차크(1937~2000) 배려로 모교인 레닌그라드대학 대외담당 부총장으로 취업했다. 솝차크가 1990년 5월 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으로 진출하고 이어 1991년 6월에는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맞게 된다. 초대 레닌그라드 민선시장이 된 솝차크는 푸틴을 부시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정치 참모’가 필요했던 솝차크 시장에게 푸틴은 모신(謀臣) 역을 맡은 ‘복심(腹心)’으로 핵심 측근이 되었다.

부시장 푸틴은 1995년 5월 옐친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인 ‘우리 집–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를 조직했다. 옐친 대통령 본인은 무소속이었으나 그가 임명한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연방 정부주석은 옐친 보위를 위해 ‘우리 집–러시아’를 창당했다. ‘우리 집–러시아’는 자율적인 정치조직이라기보다는 행정부-대통령의 수족처럼 행동하는 정당을 일컫는 권력 정당(party of power)이었다. 푸틴은 ‘우리 집-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도자로 정치적 위상이 격상됐다. 그는 KGB 첩보 요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러시아 직선 초대 대통령인 친(親)옐친 인사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푸틴 후견인인 민선시장 솝차크가 1996년 6월 시장 재선거에서 도시에 만연한 범죄와 혼란에 따른 유권자의 환멸로 낙선하자 다시 ‘실업자’로 전락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푸틴은 변호사나 유도 트레이너 등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방황했다. 새로 당선된 시장이 푸틴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으나 솝차크 시장의 은고(恩顧)를 입었던 푸틴은 “배신의 대가를 받느니 충성을 위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좋다”고 단칼에 거부하고 의리를 지켜 주변에 배신을 모르는 ‘의리남’으로 각인된다.

이때 솝차크 시장과 함께 일했던 여러 부시장 중 한 명인 알렉세이 쿠드린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아나톨리 추바이스가 ‘실업자 푸틴’을 옐친 대통령 행정실장(비서실장)이자 사위로 최측근인 발렌틴 유마셰프에게 천거했다. 푸틴은 모스크바의 대통령 권부(權府)인 크렘린에 입성해 소련 해체 후 국유재산 처리를 담당한 ‘재산관리부 2인자’로 중앙 무대에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깔끔하고 기강 잡힌 일 처리로 모스크바에 온 지 1년도 안 된 1997년 3월 대통령비서실 차장, 이어 제1부실장으로 고속 승진했다. 푸틴의 사심 없는 일 처리 솜씨를 눈여겨봐 온 옐친은 1998년 7월 KGB 후신인 연방정보국(FSB) 의장으로 발탁해 수직 상승을 거듭했다. KGB 입사 20여 년 만에 이름만 FSB로 바뀐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어 ‘권력의 문’을 연 푸틴은 취임과 함께 ‘비밀경찰’도 부활시켰다.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정치판은 ‘정보가 권력’이고 정보 양(量)이 ‘권력의 크기’를 결정한다. 크렘린 권력 심장부 대통령궁을 거쳐 FSB를 장악한 푸틴은 신생 러시아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는 위치에서 미래 권력의 향배를 주시하고 있었다. 체첸 독립을 막기 위한 체첸전쟁에서 과거 KGB의 역량을 FSB에 복원해 체첸 반군에 대한 역공작, 도청, 암살 등 주요 수단도 확보했다. 그가 KGB에서 단련된 노련한 솜씨로 묵묵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근무하는 동안 1996년부터 시작된 옐친 대통령 집권 2기는 측근들의 전횡과 부패가 극심해지고 정치사회적 혼란의 난맥상이 극에 달했다.

소련 붕괴에 이은 10년간 난세가 된 러시아의 혼란과 불안은 새로운 지도자 출현을 재촉했다. 러시아 차르들과 스탈린 등 소련 독재 체제 유산인 비밀경찰 등 보안기구에 익숙한 ‘파워 엘리트’들은 KGB를 복원해 국가 경영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옐친은 소련 몰락과 현대 러시아 출범 과정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 줬다. 그러나 취임 후 격무와 보드카 등 독주에 취한 알코올 중독, 심장병 등 질병으로 ‘종합병동’이 된 ‘재선 대통령’ 옐친은 퇴임 후 여생을 의탁할 차기 후계자 선택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상회담에서 술주정이 특기였던 그는 각종 합병증으로 심신이 지쳐 퇴임 후 ‘신변 안전’을 고려해 후계자 선정을 고심한 것이다.

옐친은 장고 끝에 자신과 공산당이 주도하는 국가두마(러시아 연방 의회의 하원) 간 타협의 산물이었던 프리마코프를 1998년 9월 총리에 임명한다.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중동 특파원 출신으로 옐친 정권하에서 FSB 의장과 외무장관, 총리를 맡아 냉전 종식 후 미국 독주를 막고자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외치는 등 ‘준비된 대통령’으로 인기가 높았던 프리마코프. 그는 차기 주자로 급부상하자 ‘대통령 권한 축소’ 요구 등 옐친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차기 대선에 대한 야심(野心)이 없음을 밝혀 옐친의 심기를 삭이려 했으나 오만해진 그는 1999년 5월 전격 해임당했다. 국정 주도권을 놓고 대통령에게 맞서는 등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하나의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함께 살 수 없다(一山不容二虎)’라는 중국 속담대로다. 후임에 무색무취한 스테파신을 임명하자 해임된 프리마코프와 모스크바 시장 로슈코프는 연합정당을 결성했고, 특히 로슈코프 측은 옐친과 옐친 패밀리의 부정부패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옐친 대통령의 1991년 소련 해체, 1993년 의회를 향한 무력대결, 체첸전쟁 개시, 군대 약화, 1990년대 경제위기 등 5개 죄목으로 탄핵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대통령 탄핵은 소련 해체와 옐친의 개혁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공산당뿐만 아니라 국민 다수도 크게 호응해 탄핵안이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절체절명(絶體絶命) 위기에 몰린 옐친은 정치적 도박을 결심한다. 그동안 정치적으로 키워준 스승 솝차크에게 ‘의리’를 지키고 확고한 충성으로 보좌하는 푸틴을 주목해 온 옐친은 푸틴에게 ‘차기 대권’을 암시하며 총리직을 제안하며 한때는 자기편이었지만 정적이 된 자들을 이기는 방법을 타진했다.

옐친의 총리직 제의에 대선(大選)을 염두에 둔 푸틴이 “선거운동은 정말 싫다”며 완강하게 사양했다. 옐친은 선거 전문팀인 미국 정치홍보 전문가들에게 스핀닥터 역을 맡겨 재선 때 신승(辛勝)했던 경험을 상기했다. 옐친은 선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국민이 갈망하지만 옐친 자신에게 부족해 보이는 면모, 곧 신뢰, 권위, ‘군인다운 태도’를 보이면 된다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당시 FSB 책임자였던 푸틴은 주로 레닌그라드대 출신인 학연과 KGB 시절 강한 인연과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어온 실로비키(러시아어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로,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을 비롯해 정보기관과 군, 경찰 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깔린 정보망과 도청 등을 통해 옐친 대통령실의 동정 등 ‘내밀한 권력의 기밀’을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예부터 ‘지혜로운 자는 재주를 감추고 우둔(愚鈍)함을 보인다’고 했던가? 술에 절어 기분에 따라 통치하던 변덕쟁이 옐친 대통령 앞에서 푸틴은 ‘바보’처럼 한없이 몸을 낮췄다. 총리직을 맡으라고 설득해도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며 발톱을 감추는 철저한 ‘도회술(韜晦術)’로 응대했다. 겸애설(兼愛說)이라는 독창적 학설을 창시한 중국 노나라 사상가 묵자(墨子)의 “미인은 문밖에 나오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만나길 원하고,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려 애쓰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음지(陰地)에서 은밀하게 실력을 쌓으며 묵묵히 미래를 준비하고 후일을 도모(圖謀)한 것이다.

옐친은 한사코 총리직을 고사(固辭)한 푸틴을 설득해 1999년 8월 TV 연설에서 총리로 지명하고 그가 “다양한 정치 세력과 힘을 모아 러시아의 개혁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후계자임을 암시했다. 총체적 난국에 빠진 러시아의 경제·정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때에 푸틴이 ‘위로는 단 한 사람만 섬기면 되고 아래로는 온 백성을 다스린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총리에 발탁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여서 ‘중령 계급’인 ‘무명의 스파이’가 소련 붕괴 10년 만에, 모스크바 입성 3년 만에 정상 권력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 시운(時運)이 맞아떨어진 푸틴이 ‘대통령선거에 나설 생각이 없지 않다’고 뒤늦게 밝혔지만 옐친의 공식 후계자로 확고부동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본인은 물론 언론도 당시 ‘무명인사’ 푸틴이 1년 동안 세 명이나 바뀌는 그 전임 총리들보다 오래 버티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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