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세 도입은 멈춰달라는 우회적인 읍소였을까. 정유업계는 부랴부랴 에너지 취약 계층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기부금을 내놓았다.
에쓰오일은 정유사 중 가장 먼저 나서 10억원을 기부했다. 하지만 에쓰오일에게 돌아온 건 야유였다. 뒤이어 나선 정유업체들의 기부금액이 각 사별로만 100억원대라는 이유에서였다.
드러난 숫자만 보면 에쓰오일이 다소 인색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유업계 기부가 이뤄진 물밑 과정을 들여다보면 에쓰오일은 억울함을 호소할 법하다.
하지만 공동 기금 조성을 포기했던 타사들은 에쓰오일의 기부 소식에 부랴부랴 입장을 바꿨고, 같은날 현대오일뱅크가 기부 의사를 밝혔다. 다음날 SK에너지, GS칼텍스도 이들 행렬에 동참했다. 에쓰오일을 제외한 3사의 기부금액은 100억원을 넘어섰다. 결국 초라한(?) 기부금을 낸 에쓰오일은 '쪼잔하다'는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막판 공동 기금을 무산시킨 타사가 야속할 수밖에 없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정유업계 기부 대부분이 즉납이 아닌 약정인 것도 여론이 무서워 내놓은 '졸속 기부'라고 씁쓸해 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유업계의 눈치보기식 기부는 반복되는 일이다. 2008년 고유가로 국민 부담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정유업체만 사상 최대실적을 기록하는 등 호황을 누린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유4사는 석유협회를 통해 3년간 1000억원 규모의 특별기금을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다 이후로 협회 차원에서 기부금을 모으는 관례가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각 사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가 확고해진 영향이다. 자금 집행의 투명성을 높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이사회 눈치보기가 심해졌다. 특히 정유업계는 SK를 제외한 3사의 주요 주주가 외국계이기 때문에 한국 여론을 즉각 반영해 빠른 의사 결정과 자금 집행이 이뤄지기 어려운 구조다.
또 국정농단 사건 이후로 협회 차원에서 기금을 대던 대기업들이 큰 고초를 겪은 일을 반면교사 삼는 분위기가 강해지기도 했다. 이번 공동 기금 무산도 이사회의 입김 등이 작용했을 거란 분석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재계 순위대로 기부금액이 정해지는 게 관례이기 때문에, 따로 기부를 하더라도 업체끼리 금액을 사전에 귀띔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경쟁사들끼리 이런 암묵적 룰을 깨고 얄미운 짓을 했다는 비난을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는 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이럴 때마다 기업의 돈이 사회 문제를 푸는 윤활유가 된다. 기부하면서도 액수가 적다고 비난 받는 게 건강한 사회일까. 기부라는 훈훈한 일에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기업 간 올바른 소통 문화가 정착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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