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3년 만에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인천공항까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비행기를 탔을 때 마스크를 벗었다. 거의 모든 탑승객이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환승하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도착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마스크를 쓴 사람은 드물었다. 하물며 전 세계에서 방문하는 하노버 산업박람회장(Hannover Messe)에서도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그렇게 독일로 가는 여정에서 코로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제 사람들은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고 세계는 다시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는 기업, 지자체, 대학, 정부가 산업자동화, 에너지·환경 기술, 생산기술, 연구 성과 등을 전시한다. 매년 협력국을 초청하여 그 나라 산업과 기업을 소개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나라도 2009년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 협력국으로 지정되어 많은 기업이 기술과 제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금년에는 인도네시아가 협력국으로 지정되어 인도네시아 업체 150여 개가 참가했다. 4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4000여 개 업체가 참가했으며 약 13만명이 방문했다. 방문객 43%는 전 세계에서 온 외국 방문객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되는 국제전자산업박람회(CES)에서 그렇듯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도 다양한 전문가가 초빙되어 강연회와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금년 하노버 산업박람회의 주요 담론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디지털과 연계된 자동화였고, 다른 하나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 체계 구축이었다. 전자는 '인더스트리 4.0(Industry 4.0)' 맥락에서 토의되었고, 후자는 '에너지 4.0(Energy 4.0)' 틀에서 논의되었다. 물론 이 두 가지 담론은 전 세계에서 참가한 기업들의 완성된 기술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향후 실현될 가능성도 높았다.
인더스트리 4.0과 에너지 4.0이라는 변화를 떠받치고 있는 키워드는 '디지털(digital)'과 '재생 가능한(renewable)'이었다. '디지털'은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며 적용하는 기술이지만 그것이 센서, 계측, IoT, 기계공학과 결합되어서 '자동화(automation)'의 기초가 된다. 생산은 이러한 자동화에 의해 효율화되는 추세에 있었다. 예컨대 지멘스(Siemens)는 전반적인 산업에 적용되는 자동화 설비를 설계하고 공급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재생 가능한'은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 4.0의 모토였다. 풍력, 태양광, 수소 발전이 그 중심에 있었다.
예컨대 디지털화에 기초한 자동화 기술 사례로는 바이드뮐러(Weidmüller)사가 개발한 맥주제조공정 자동화시설이 인상적이었다. 맥아, 홉, 효모, 물로 맥주를 제조하는 과정을 디지털 기기로 측정하여 정확한 데이터에 입각해서 자동적으로 당화, 여과, 끓임, 청정, 효모 첨가, 발효 등 과정이 제어되는 시스템이었다. 아직 인공지능(AI)이 접목되지는 않았지만 향후 이러한 자동화시설이 진화한다면 인간의 노동 없이도 데이터에 입각해서 스스로 학습하며 최고의 맥주를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자동화시설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에너지 4.0의 중요한 축으로서 수소발전 기술도 그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물에서 그린 수소를 만들어내 그 수소로 전기를 생산하고 충전하는 수소발전기를 만드는 여러 업체가 있었다. 예컨대 슈나이더(Schneider)사의 수소발전기와 페스토(Festo)사가 그린 수소를 만들어 내는 공정기술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부러웠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일찍이 수소발전 기술을 개발했지만 최근에는 기술적 경쟁력이 정체되었고 현재는 수소자동차 기술을 제외하고 유럽 기업들이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실정과 비교해서 놀라운 점은 유럽에서는 이미 인더스트리 4.0과 에너지 4.0 기술을 결합해 일상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콘셉트로만 풍력과 태양광을 이용해서 전기를 만들어 물에서 수소를 추출하고 그 수소로 전기를 다시 생산하여 주변의 공장, 교통, 가정에 공급하는 시스템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이미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여 에너지 4.0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력, 태양광, 수소발전이 디지털과 결합되어 전기가 생산되고 지역별·시간별로 전기수요가 측정되며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다.
하노버 박람회를 둘러본 뒤 독일 북쪽 평지에 위치한 하노버를 떠나 독일 남쪽으로 이동했다. 눈에 비친 바깥 풍경은 하노버 박람회에서 본 에너지 4.0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바람골에는 어김없이 풍력발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몇 년 전과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독일이 전기 생산을 위한 새로운 자원으로 바람을 제대로 발견하여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우리나라 풍력발전 기업들과 이차전지 업체들이 유럽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 흐름은 바람을 타고 오고 있었다.
독일 남쪽인 뮌헨에 도착해서 건축설계사인 친구 집을 방문했다. 독일 친구는 하노버 박람회에서 무엇을 봤는지 내게 물었다. 본 것을 말했더니 이미 자신은 자기 집에 디지털화된 에너지 4.0을 실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단독주택 지하실로 데려갔다. 지하실에는 두 개의 시설이 있었다. 하나는 수도관을 지하 160m를 통과하도록 해서 지열로 따뜻한 물을 얻는 펌프 시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3층에 설치된 태양광에서 얻은 전기를 제어하는 시설과 충전하는 시설이었다. 그가 설치한 충전기가 우리나라 LG에너지솔루션 제품이어서 반가웠다.
친구는 3층으로 가서 태양광시설을 보여주며 다른 집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주변 다른 집 지붕을 보니 거의 모든 집에 태양광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태양광 패널을 받쳐주는 구조물을 깔아서 비용이 더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집에는 구조물 없이 바로 지붕 위에 태양광시설을 설치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휴대폰을 켜서 앱으로 들어가더니 그 앱으로 자신의 태양광시설에서 언제 얼마나 전기가 생산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한 데이터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에너지 4.0이 디지털과 결합되어서 소비자가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집 반대편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풍력발전를 가리켰다. 그는 그곳에서 약간 부족한 전기도 받아서 쓴다고 말했다. 여름에는 전기가 남지만 겨울에는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물었다. “독일은 이런 시설이 보편화되어 있나 봐?” 그가 말했다. “최근 몇 년간 풍력발전이 늘었어. 나처럼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지붕에 태양광시설을 설치했고.” 내가 다시 물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준거야?”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개인 부담이야.” 내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가 간단히 말했다. “어쩔 수 없어.”
개인이 비용을 부담하면서까지 태양광시설을 설치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물었더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전기료가 너무 비쌌거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서 가스가 들어오지 않자 전기료가 폭등했고, 장기적으로 보면 태양광시설을 설치해서 각 집에서 전기를 생산해서 사용하는 게 저렴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나는 웃고 말았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이성의 간계(List der Vernunft)'라는 헤겔(Hegel)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푸틴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여파로 아이러니하게 유럽에서는 에너지 4.0이 촉진되었던 것이다.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전기료가 높아지면 에너지 4.0이 촉진될 수 있을까? 아마도 높은 전기료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이 심하겠지.’ 아무튼 독일은 전기료가 비싸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치 시스템 안에서 녹색당이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평범한 독일인의 의식에도 지속 가능성과 재생에너지에 대한 선호도가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에너지 4.0은 정부, 시민, 기업이 체계적으로 추진할 때 실현될 수 있는 콘셉트다. 우리나라 기업도 에너지 4.0을 추진할 기술을 개발하고 활성화할 수 있는 역량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도 재생에너지 쪽으로 향하고 있다. 결국 정치 영역에서 에너지 4.0을 위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준호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뮌헨대(LMU) 정치학 박사 △미국 UC 샌디에이고 객원연구원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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