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1박2일 일정을 마치고 돌아갔다. 일정은 짧았지만 양국 정상이 합의한 의제는 가볍지 않다. 12년 만의 정상 셔틀외교 복원이 갖는 의미도 간단치 않다. 인상적인 몇 장면만 꼽자면 일본 총리로서 12년 만에 국립 현충원 참배, 진전된 과거사 메시지, 경제협력 구체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한국 시찰, 히로시마 G7에서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 공동 참배 계획 등이다. 야당은 ‘호갱 외교’라고 비판했지만 진전된 발판을 마련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무엇보다 셔틀외교 정상화는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신뢰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두 정상이 내놓은 메시지는 이를 집약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셔틀외교 복원에 12년 걸렸지만, 두 사람이 상호 왕래하는 데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의 결단과 행동에 경의를 표한다. 한·일 관계 강화를 원하는 마음을 저도 공유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기시다 총리 방한을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와 ‘시작이 반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으로 정리한다.
△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2018년 1월,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체적인 국민 여론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야당(국민의힘)은 북핵 고도화를 감추기 위한 술책으로 의심된다며 비판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반응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며 야당 주장을 반박했다.
북한이 개성공단경협사무소 폭파에 이어 잇따라 미사일을 쏘고, 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우려를 현실로 바꿔 놓았지만 외교에서 ‘밀당’은 상식이다. 외교의 기본은 대화를 통해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게 시작이다. 지난 정부는 모든 대화 채널을 끊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협상 채널을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민주당에게 필요한 자세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정당화하면서 했던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다.
△ 시작이 반
기시다 총리는 과거사와 관련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으로 피해자를 우회 지칭하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강제 징용자 피해자를 지칭하는 것이냐는 거듭된 질문에 “나 자신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수많은 분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개인적 심정’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일본 총리가 과거사 문제에 직접 유감을 표명한 건 2015년 아베 담화 이후 8년 만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수년간 강제징용 피해자를 ‘구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 규정하며 책임을 회피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먼저 유감을 표명한 셈이다.
또 “1998년 10월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이 같은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언론은 방한 전 “반성이나 사죄는 없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기시다 총리는 참모들에게 “과거사는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사전 실무협상에서도 과거사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예상을 깬 발언은 윤 대통령이 지난 3월 초 매듭을 푼 강제징용 해법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대통령실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 감사하다. 한·일 미래 협력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윤 대통령 반응을 전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양국 정상은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기간 중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탑을 공동 참배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자국 희생자만 참배했을 뿐 한국인 희생자 추모는 외면해 왔다. 양국 정상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탑을 찾아 참배한다면 과거사 화해도 한걸음 내딛게 된다. 이와 함께 두 정상은 후쿠시마 오염수 조사를 위해 한국 전문가 사찰단을 오는 23일 후쿠시마 원전 현장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외 검증을 수용한 건 한국이 처음이다. 또 북핵 위협에 대응해 억지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견고한 양국 기업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도 합의했다.
▲ 천리 길도 한걸음
대화 채널을 복원하고 신뢰 기반을 구축한 만큼 이제부터는 진정성 있는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서로 입장을 헤아려 미래로 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진정성 있는 사과는 지나쳐도 부족하지 않고, 통 큰 용서 또한 인색할 필요가 없다. 나가사키 평화자료관과 구마모토 오무타(大牟田)시 징용희생자 위령비,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 이시카와현 윤봉길 의사 기념비는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확인하는 현장이다. 양식 있는 일본 시민들은 과거사를 되새기고 군국주의 일본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가 세운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은 반성과 사죄하는 장소다. 자료관은 군국주의 일본의 과오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가 주도한 평화자료관은 “가해의 진실을 확인하고 피해자 아픔을 헤아려 전후 보상 실현에 헌신해주길 바란다”며 설립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가해자로서 일본 책임을 인정하고 조선인 1만2,000명~2만2,000여 명이 피폭됐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감추고 싶은 역사를 용기 있게 드러냈다.
조선인 노무자 9500여 명을 동원한 미이케(三池) 탄광이 있는 오무타시는 1995년 징용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면서 땅을 무상 제공했다. 또 탄광을 운영했던 일본 기업은 비용을 부담하고 매년 합동 추도식을 갖는다. 오무타시는 미이케 탄광 전시물(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등재)에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했음을 알리고 있다.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 또한 균형 잡힌 역사관을 제시하고 있다. 박물관 측은 “분로쿠 게이초 역(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 조선에서는 의병 봉기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 격퇴했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조선 전역에 피해를 미쳤고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며 자신들에 의한 침략 전쟁임을 분명히 했다. 가나자와 시민들과 의회 또한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건립에 땅을 제공하고 성금 모금에 동참했다.
기시다 총리는 “한·일 양국 간에는 수많은 역사와 경우가 있었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온 선인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미래를 위해 협력하는 게 일본 총리로서 책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책임 있는 양국 정치인들이라면 공유해야 할 인식이다. “윤 대통령은 역사를 내다 판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 “호갱 외교”라는 무책임한 비난만으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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