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알게 되었어, 소냐. 권력은 용기를 내 몸을 굽혀 그것을 줍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이야. 오직 하나, 하나만이 필요한 거야. 용기를 내는 일만이 필요한 거야!”
(도스토옙스키, 1821~1881년, <罪와 罰>, 제4부 제4장)
소설 <죄와 벌>에서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 그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낫다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내세운 ‘인간 경계를 뛰어넘는 살인범’ 라스콜리니코프. 그가 굶주리는 가족을 위해 매춘부(賣春婦)가 된 소냐에게 ‘권력의 본질’을 말한 대목이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를 위해 자신을 던져 구원자 역할을 맡았던 ‘순수한 영혼’의 소냐에게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라고 외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소설의 무대가 된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에서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청년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를 느끼며 ‘보통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초인사상(超人思想)을 익힌 푸틴이다. 훗날 대통령이 돼 수차례 전쟁을 치르고, 지금도 전쟁중인 푸틴이 추천한 9권의 책 가운데 2권이 가장 좋아하는 동향(同鄕)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라고 밝힌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군주론』에서 “주어진 운명(fortuna)을 용기 있는 결단(virtu)으로 극복하는 자가 군주”라고 했다. 로마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의 “운명은 강한 자를 돕는다”는 말대로 푸틴은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한 자가 강한 자’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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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본질’을 본능적으로 꿰뚫어 본 FSB(소련의 국내 치안과 방첩을 담당하던 KGB 제2총국의 후신 중 하나로, 러시아 국내 첩보와 방첩활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 통칭 聯邦保安局)국장 푸틴이 ‘옐친 정부’ 권부(權府)인 FSB·구 KGB 등, 군부, 경찰 출신과 권력 실세 등 비밀기관에 종횡으로 엮인 ‘실로비키 네트워크’를 통해 ‘몸을 굽혀’ 용기를 내 ‘권력을 줍는 동안’, 총체적 난국에 빠진 러시아의 경제 정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 집권 6년만인 1991년 초강대국 소련이 건국 74년 만에 15개 공화국으로 분리, 해체된 뒤 ‘러시아공화국’ 새 집권자가 된 옐친 초대 대통령의 무능한 국가경영은 엉망진창이었다. 미래 번영이나 희망을 줄 국가 비전 제시에 실패한 옐친에 실망한 러시아인들은 유능하고, 국익을 신장시킬 국가재건의 영웅을 대망(待望)하고 있었다. 이때 옐친은 권력서열이 한참 낮고, 중앙정계에 낯선 무명(無名:noname)의 첩보원 출신 푸틴 FSB국장을 파격적으로 총리에 발탁한다.
체첸전쟁 승리 ‘영웅 이미지’ 부각, 대통령 당선
총리가 된 푸틴은 당시 국가적 현안이었던 체첸전쟁에 직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돌파구를 마련했다. 1996년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잠시 소강상태였던 1차 체첸 전쟁(1994~96년)은 막대한 전쟁비용 누적 등 국가리스크를 키우고 있었다. FSB 국장 때부터 체첸 독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구상하고 있던 푸틴 총리는 체첸전쟁을 통해 옐친이 말한 ‘군인다운 태도’를 선보이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옐친 대통령에게 체첸에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요구한다. 푸틴 총리는 1차 전쟁과 달리 1999년 9월, 러시아군과 내무부 소속 병력에 전격적인 2차 체첸 침공을 명령해 체첸 전체 장악을 시도했다.
그는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 총리로서 정치적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듯, 체첸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푸틴은 2주간 체첸 반군이 장악한 다게스탄 마을을 공습,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공포감을 조성하며 체첸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직접 전투기를 몰고 전투 현장을 깜짝 방문해 공을 세운 러시아군에 훈장을 달아주는 장면 등을 연출, 늙고 병약한 옐친 대통령에 대비되는 젊고 강력한 40대 총리 이미지를 강렬하게 부각시켰다. 2차 전쟁의 경우, 1차 전쟁과 달리 모스크바 테러를 겪은 뒤라 푸틴의 과단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에 조응(照應)해 지지율이 매우 높아졌다. 8월에 총리로 지명될 때 푸틴의 ‘대통령 후보’ 지지율은 2%에 불과했으나, 10월에는 27%, 11월에 40%를 넘어서면서 ‘국가적 영웅’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 푸틴 총리는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자신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사들을 총리실장, 부총리, FSB 제1부국장, ‘단합당’ 원내 당수 등에 전격적으로 기용하는 한편, 구 KGB 동료들을 안보위원회 서기, FSB 국장 등에 발탁하여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거미줄처럼 깔린 실로비키 정보망을 통해 ‘황금 어항에 갇힌 금붕어’를 보듯 부패한 권력 집단이 된 옐친 패밀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고 있던 푸틴은 착착 대권 장악을 위한 물밑작업을 추진했다. 40대 전후반의 파워 엘리트 100여 명으로 구성된 두뇌집단(think tank)인 ‘전략연구센터’를 발족시켜 대선 전략뿐만 아니라 ‘강한 러시아’를 목표로 한 ‘국가개조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집권 후 구체적인 통치로드맵도 작성해 러시아가 직면한 대내외적 복합 위기 대처방안을 준비한 것이다.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는 이유는 나서야 할 때 제대로 나서기 위함이다. 미인에게는 질투가 따르고 영웅에게는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어서 몸을 낮춰 인내심을 갖고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던 푸틴은 기회를 포착, 맹호출림(猛虎出林)격으로 대선을 앞두고 초반에 기세를 제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기선제압책으로「러시아 연방 신국가 안보개념」(2000. 1. 10)과 우리나라의 국회 격인 국가두마의 개원 연설(1.18) 및「신 대외정책 개념」(3.24) 등 국가청사진을 발표,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대권 장악을 모색하였다. 특별한 배경이나 뛰어난 경력이 없던 그는 ‘선수를 쳐서 적을 제압한다’라는 선즉제인(先則制人)의 병법에 따라 있는 힘을 다해 국가적 과제 해결에 선제적으로 대응, 성심껏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퇴임 후 길은 여러 갈래지만 퇴로(退路)를 못 찾아 방황하는 옐친 대통령을 향해서는 권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척 자신의 재능과 본심을 숨기는 철저한 도회술(韜晦術)로 무장한 지략(智略)을 발휘, 옐친의 환심을 사며 대응했다.
옐친은 퇴임이 다가오며 마지막 숨통을 조여오는 국내외적인 위기상황에서 푸틴을 포함한 보리스 넴초프 부총리, 세르게이 스테파신 내무부 장관(이후 넉 달간 총리), 니콜라이 악세넨코 교통부 장관 등 10여 명의 보호막이 돼줄 후계자를 놓고 저울질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결과적으로 푸틴은 퇴임 후가 불안한 옐친의 유일한 방패막이가 자신임을 ‘업무’를 통해 옐친 대통령과 옐친 패밀리에게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정치적 포석을 통해 암시했던 셈이다.
당시 옐친의 사위로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최고 실세였던 유마셰프 비서실장은 훗날 푸틴의 업무처리 능력에 반해 푸틴을 행정실 제1부실장으로 발탁했다고 밝혔다. 그는 “푸틴과 몇 달 동안 함께 일하면서 그의 업무 능력을 확인했다”며 “사안을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유마셰프는 “옐친은 1991년 소련의 붕괴를 이끌었던 세대는 자신과 함께 떠나야 하고, 20년 정도 젊은 45~50세 세대가 나라를 맡아야 한다”며 “나라를 믿고 맡길 수 있으며 자신의 개혁정책을 계속 추진할 사람을 원했다”고 증언했다.
재직 중 숱한 과오로 퇴임 후 ‘신변보장’을 고민하며 자신을 지켜줄 ‘신뢰할 만한’ 강직한 인물을 찾아 암중모색하던 옐친은 푸틴을 놓고 마지막 저울질을 했다. 유마셰프는 ‘푸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옐친에게 “푸틴이 일하는 방식을 지켜보니, 앞으로 더 큰 일, 더 어려운 일을 할 준비가 된 친구”로 ‘최고의 후보’라고 강력하게 추천, 킹메이커가 된다. 푸틴 총리를 후계자로 낙점한 옐친은 또 한 번의 정치적 도박으로, 2000년 새해가 밝기 3주 전 푸틴에게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제의했다. 푸틴은 ‘부담하기엔 다소 무거운 짐’이라며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겸양하며 고사(固辭)했지만, 옐친은 “이것은 운명이요”라며,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1999년 말 대통령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난극당치(亂極當治)’, 옐친 퇴진과 신성(新星) 푸틴 등장
소련의 갑작스러운 붕괴 이후 신생 러시아가 탄생했지만, 옐친 집권 말기 ‘100달러만 있으면 안될일이 없다’던 정치 경제 등 총체적 국가적 혼란은 그야말로 ‘난극당치(亂極當治)’였다. 중국의 주희(朱熹)가 <논어(論語)>해설에서 “혼란(混亂)이 극에 달해, 그 끝에 이르러 난세(亂世)가 되면 ‘새로운 질서’가 태동된다”고 지적한 대로 러시아는 새 질서를 주도할 새 인물을 대망하고 있었다. 오후만 되면 독한 보드카에 취한 알코올 중독과 고질적인 심장질환에 시달리는 옐친 대통령의 병상 통치는 국가경영의 비정상화를 가속화 해 사실상 국가경영이 마비되는 국정 난맥상이 극에 달한 국가적 위기상황이었다.
헌법에 따른 정상적 선거 일정상 대선이 2000년 6월이었지만 옐친 대통령이 임기를 6개월 앞당긴 조기 사임으로 총리인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면 ‘옐친 퇴임’ 90일 이내인 2000년 3월 26일에 대통령을 선출해야 했다. 현직 대통령 권한대행 ‘프리미엄’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르게 배려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고려 끝에 옐친 대통령은 인기 급락과 경제 파탄이라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국가 위기 상황에서 1900년대가 끝나는 1999년 12월 31일, ‘금세기 마지막 날인 오늘’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푸틴 총리에게 ‘대통령직무 대리’를 맡긴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날 낮 12시 공공 TV(ORT) 생방송에서 옐친은 창백하고 근엄한 표정을 한 채 건강에 대한 고려와 함께 후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6개월 동안 더 권좌에 남아 있지 않고 당장 하야(下野)한다면서 전격적으로 ‘대통령직’ 사퇴 메시지, 즉 ‘새 천년을 새로운 인물과 맞이해야 한다’는 퇴임의 변(弁)을 밝혔다.
그는 재임 중 실책(失策)에 용서를 구하고 러시아가 새로운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21세기’에 들어가는 ‘역사적 상황’을 통절하게 인식, “난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당신들의 꿈을 위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또한 난 당신들의 희망을 옳다고 주장하지 못한 데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라며 “나는 떠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나름대로 다 했습니다”고 담담하게 토로했다.
심신이 지쳐 집무가 힘들던 옐친대통령의 선양(禪讓)으로 ‘자신의 맡은 바 직책’에 최선을 다해 묵묵히 일해온 푸틴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기다리지도 않던 선물로 ‘러시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 시기’를 기다리며 인내하고 인내하던 시진핑(習近平)이 그랬던 것처럼 대권(大權)은 홀연히 찾아드는 선물 같은 것이라는 러시아판 맥연회수(驀然回首)였다. 소련이 해체된 난세의 천시(天時), 페테르부르크 중심의 네트워크라는 지리(地利)와 KGB 인맥이 뒷받침된 인화(人和) 3박자가 합을 이룬 천운(天運)이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푸틴의 등극은 이미 정해져 있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천운(天運)의 運은 ‘돌 운’으로 결국 ‘운은 돌고 돈다’라는 의미로 운은 알아서 오고 또 알아서 간다고 하던가.
천시(天時)가 맞아떨어져 천명(天命)을 받은 푸틴은 드라마틱한 연출로 20세기가 끝나는 1999년 12월 31일 자정이 지나 21세기가 열린 2000년 1월 1일 정초(正初)부터 ‘러시아 연방 대통령 대행’으로 러시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999년 12월 3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의 첫 번째 포고령은 ‘러시아 연1974년 미국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대권을 승계하면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관련 위법행위에 특사(特赦) 조처를 내림으로써 닉슨의 모든 형사 조치를 마무리한 것처럼 옐친의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한 조치였다. 방 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안전보장’으로, 옐친 전 대통령 패밀리에게 ‘평생 면책특권 보장과 여생의 안전’에 관한 것이었다. ‘러시아 연방 대통령 대행’ 푸틴은 2000년 3월 26일 합법적인 민주적 선거절차에 따라 쟁쟁한 거물들을 꺾고 53%의 지지율로 옐친 외 누구에게도 크게 신세 지지 않고 천운(天運)으로 48세에 ‘러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우리가 알아챌 겨를도 없이 우리 눈앞에 화려한 신데렐라(물론 남성이지만)의 등장이라는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은 역사가 연출되고 있다. 이야기의 매력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 아닌, 어제 갑자기 나타나 대통령 역할을 원하지 않는 자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전 국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한국, 푸틴의 리더십을 배우다』, 미하일 출라키, 2005)
푸틴 대통령은 내년인 2024년까지 임기를 마치면 24년 집권, 옛 소련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29년)을 제외하면 현대 러시아의 지도자 가운데 최장기 집권자가 된다.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더 역임할 수 있어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큰 권력을 가진 권력자라도 미련 없이 ‘급한 물살에서 용감히 물러나는’ 급류용퇴(急流勇退)처럼 물러날 때가 되면 용단을 내려 스스로 퇴진하는 항룡유회(亢龍有悔)하지 않는 지혜가 큰 지도자 덕목이다. 옐친은 진퇴(進退)의 묘수를 발휘, 푸틴 총리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6개월 임기를 앞당겨 전격 사임하는 결단을 내려 국가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칭송받으며 76세로 천수(天壽)를 누렸다. 수나라 왕통(王通)도 <지학(止學)>에서 인간의 승패와 영욕에서 평범과 비범의 엇갈림이 ‘멈출 지(止)’란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설파했다. 범사(凡事)에 때가 있듯이 ‘나아감’과 ‘물러설’ 때를 정확하게 잡아 행동하는 ‘지학(止學)의 묘용(妙用)’을 외면한 푸틴 대통령은 내년 선거 승리를 노려 우크라이나를 침공, 수만명 살상 등으로 국제전범으로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종신 장기집권을 노린 교묘한 대중조작과 언론통제로 몇 차례 개헌을 통해 합법을 가장해 권력을 유지, 용퇴의 기회를 놓친 푸틴은 이제 기호지세(騎虎之勢)의 처지가 되었다. 호랑이를 타고 가다 도중에 내리면 잡아먹히듯 중도에 그만둘 수 없는 절박한 형세에 처한 푸틴의 미래는 히틀러 등 과거 독재자의 말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구소련의 영광을 재현할 만큼 ‘러시아 제국’ 재건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판을 얻은 푸틴이지만 공성신퇴(功成身退), 즉 어떤 자리에서 업적을 이뤘을 때 영광을 누리려고만 하고 물러날 때를 놓친다면 큰 화를 입는 경우가 많은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는 헤겔의 역설적인 지적을 무시하는 푸틴의 비극적 종말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감상이다.
박종렬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철학과 ▷중앙대 정치학 박사 ▷동아방송·신동아 기자 ▷EBS 이사 ▷연합통신 이사 ▷언론중재위원 ▷가천대 신방과 명예교수 ▷가천대 CEO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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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제왕학 정말 흥미진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