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쌀 가게가 있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쌀을 사 먹었다. 어느 날 마을에 밀가루 가게와 잡곡 가게도 생겨서 마을 사람들은 말 그대로 혼·분식을 할 수 있게 됐다. 밀 가게는 점점 커져 갔고 쌀 가게의 심기는 불편해 졌다. 급기야 쌀 가게는 밀 가게를 '양아치'로 규정하고, 밀 가게에는 자기네 쌀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뿐이 아니다. 잡곡 가게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자기네 쌀을 밀가루 가게에 되팔지 않는 조건으로만 쌀을 팔기 시작했다. 국수를 먹고 싶은 밀가루 가게의 처지가 딱해서, 잡곡 가게는 자기네 잡곡에 쌀을 섞어서 혼합곡식으로 밀 가게에 팔았다. 이를 알게 된 쌀 가게는 혼합 곡식에 자기네 쌀의 비율이 25%가 넘으면 자기네 쌀이 상당한 비중이니 그렇게는 팔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팔고 싶으면, 먼저 자기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밀 가게에는 쌀 막걸리도 팔 수 없으며, 떡도 팔 수 없게 되었다.
다급해진 밀 가게가 쌀 가게에서 일하던 직원이 차린 옆 동네 쌀 가게에서 쌀을 사려하니, 쌀 가게는 그 직원이 자기네 가게에서 익힌 도정 기술로 쌀을 도정하니 도정미를 팔려면 자기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난처하게 된 옆 동네 쌀 가게는 번거롭지만 밀 가게에 도정 전의 쌀을 팔고 도정 법을 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도정 기술도 쌀 가게의 기술이니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어느새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쌀 가게의 눈치를 보게 된다.
다소 황당하지만 미국의 무역제재에 근거한 이야기다. 미국 상무부(Department of Commerce) 산하의 산업보안국(Bureaus of Industry and Security)은 수출관리규정(Export Administration Regulation)이라는 법률에 근거하여 미국 제품의 해외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정확히는 산업보안국(BIS)의 제재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국가나, 개인, 회사(단체 포함)에 미국 제품을 수출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허가는 까다롭다. 밀가루 가게는 양아치 이니 쌀을 안 팔겠다는 취지다. 모든 제품이 다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5개의 제품군을 10개의 제재대상으로 품목을 분류하여 수천 개의 제품을 고유번호(ECCN)를 매겨서 규제하고 있다. 제재대상품목(Commerce Control List)은 전자, 군사, 통신 등의 민감한 산업용 소재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군사 용도가 아닌 일반 용도의 수출도 이중용도(Dual Use)라고 규정하여 규제를 하고 있다.
자국 물품의 수출 규제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규제의 대상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해외 기업까지 포함된다. 미국의 법률인 수출관리규정(EAR)의 관할권은 광범위하여 미국을 거쳐서 제 3국으로 수출되는 물품도 미국 제품으로 간주한다. 또한 제3국에서 생산되어 다른 제3국으로 수출하려는 품목도 제조 과정에서 사용되는 미국의 원재료나 원천기술이 최대 25%이상 섞여 있으면 규제대상으로 인정하여 폭넓은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 잡곡 가게에서 잡곡과 쌀을 섞어서 밀가루 가게에 팔려고 해도 쌀 가게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경우다.
품목에 따라 이 비율(De Minimis Level)은 달라져서 민감한 물품은 25% 이하로 비율이 낮아진다. 즉, 미국의 손때가 조금만 묻어 있어도 미국의 제품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아이들 장난감 만드는게 아닌 바에야 미국의 원천기술이나 소프트웨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물품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미국 제품으로 분류가 되면 미국을 거치지 않는 제3국에서 또 다른 제3국으로 보내는 수출이라도 그 수출 품목이 앞에서 언급한 규제대상품목 리스트에(Commerce Control List) 해당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해당되면 미국 정부에 수출허가(License)를 신청해야 하며 허가가 나지 않으면 수출을 할 수 없다. 물론 자신의 수출 품목이 미국의 규제대상에 해당되지 않다는 판단이 서면 그 품목은 EAR99로 분류되어 수출허가를 신청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리스트를 뒤져서 수출 품목이 허가 대상인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판단이 서지 않으면 산업보안국(BIS)에 사전에 권고의견(advisory opinion)을 구할 수 도 있지만 여기서 규제 품목이라는 답이 나오면 매번 수출할 때마다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서 그냥 조용히 수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전세계가 미국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이뿐이 아니다. 규제대상에 올라가 있는 물품의 수출(Export)뿐만이 아니라, 재수출(Re-export)과 미국 영토 내에서라도 민감 기술의 외국인에 대한 이관(Deemed Export)까지도 규제하며 수출품의 최종사용자 (End User)가 제제 대상 국가, 개인, 회사(단체)인지도 확인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법률의 위반 시에는 고액의 벌금을 포함한 형사 처벌이 있으나 해외 기업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미국과의 무역거래 제재를 포함한 경제 제재다. 국제무역에서 달러 결제를 못하게 될 수도 있고 제재대상 리스트(Prohibited User List)에 올라갈 수도 있다. 글로벌 왕따가 되는 것이다.
제재대상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수입은 할 수 없어도 수출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객사의 요구에 맞춰서 물품을 제조해야 하는 경우 고객사의 설계도면이나 구체사양등의 정보가 제조사에게 제공 되는데, 고객사 입장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미국 수출관리규정(EAR)에서 허가가 필요한 미국 기술이 포함된 정보의 제3자로부터 또 다른 제3자에게 이관(Deemed Re-Export)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게 된다. 세상에 회사가 그 회사만 있는 것은 아니니 차제에 거래처를 바꿀까 고민하게 된다. 실제 내가 자문했던 제재대상 리스트에 오른 외국의 수출기업이 겪었던 일이다.
무역제재의 목적은 누구나 알고 있다. 미국을 추월하려는 중국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넘버1과 넘버2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는 넘버3도 아니다. 원오브 뎀(one of them)이다. 지금의 시대가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인 명, 청 교체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삶이 강대국의 충돌에 영향을 받는 것 만은 사실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섬나라와 같은 처지로서 미국이 만든 법이지만 우리의 밥벌이를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미국의 무역·경제 제재법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 오르고 그 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라는 가사가 있다. 김민기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쌀만 먹고 살 수도 있겠지만, 점심은 잔치국수, 저녁은 쌀밥에 된장찌개를 먹고 싶은 날도 많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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