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이다. 아직 종전을 맞이하지 못하고 평화협정도 체결되지 않은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놓여 있다.
30여 년 전 한국 친구와 대화히먄서 “한반도 분단은 일본 탓”이라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일이다. 역사에 무지했던 나는 한반도 분단이 “미·소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만 이해했지, 설마 일본이 한반도 분단과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와 관련해 현재까지 이르는 연속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식민지배가 끝난 1945년 이전과 이후를 연관 지어 생각할 일이 별로 없다. 6·25전쟁도 일본 경제 발전에 큰 발판을 제공한 “전쟁 특수”로 인식되는 정도다. 물론 전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패전국 일본의 국제무대 복귀가 시급해진 경위나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얼마나 가담했는지에 대한 지적은 전문가들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30여 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6·25전쟁도 남북 분단도 남의 일에 불과하다는 의식에 머물러 있는 일본인이 대다수인 것이 현실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6·25전쟁을 흔히 ‘조선전쟁’이라고 부른다. ‘Korean War’에서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르듯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한반도(Korean Peninsula)를 ‘조선반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호칭을 둘러싼 한·일 간 차이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1951~1965년) 혹은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1910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는 “Korea=조선”으로 ‘조선’이라는 호칭이 반드시 북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반도의 민족을 일컫는 말도 ‘조선인’이다. 이 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차별어로 여기는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 그 말에는 차별적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한반도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 속에서 그들을 “조센진(チョーセンジン)”이라고 부르면서 말 자체가 차별 용어인 것처럼 오해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빼앗아 일본의 외지(外地)로서 ‘조선’이라고 호칭하기로 한 경위를 생각한다면 ‘조선’이라는 용어가 ‘대한제국(한국)’을 부정하는 차별적인 용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당시 한반도 사람들에게도 ‘한국’이라는 호칭보다 ‘조선’이라는 호칭이 더 친숙했던 것도 사실인 듯하다. 1897년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정해진 이후에도 당시 신문 등에는 ‘조선’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자, 즉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인데, 이들 역시 스스로를 일본어로 ‘조선인’이라고 칭하였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반도’ 출신임을 분명히 한 민족으로서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에 있던 재일조선인에게 ‘한국인’일 것을 요구했다.
북한과 치열한 체제 경쟁을 하는 가운데 정부 '관보'(1950년 1월)를 통해 “북한 괴뢰정권과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국호로서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확인한 바 있는 한국 정부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많은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을 부정하고 ‘한국’을 받아들이는 것은 식민지배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이 고착화된 ‘조선/한국’이라는 분단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여겨졌다.
‘재일조선인’을 ‘북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그들 중 90% 이상이 제주도나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 남쪽 출신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불순분자'로 간주했다. 지금도 자신을 ‘재일조선인’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중에는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조국은 분단국가가 아니라 ‘조선반도’라는 신념에 따라 ‘재일조선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한국 국민이면서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에도 모순이 없는 것이다.
광복 전후에 여러 경위와 사정으로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이 많았다. 정확한 수를 정식 통계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광복 직후 일본에는 조선인이 약 220만명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조선인, 즉 재일조선인은 60만명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전쟁 발발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재일조선인 민족단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현재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주축이 되어 재일조선인 642명이 의용병으로 전선에 파견되었다.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한국)을 모국으로 여기다가 북한에 의해 다시 모국이 상실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의용병으로 참전한 재일조선인도 있었다.
한국 정부 주일대표부도 의용병 파견에 관여하였으나 한·일 간에 아직 국교가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의용병은 당초 국군이 아닌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형태로 참전했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났다.
6·25전쟁 중에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이 독립하게 되었고 연합군 일원으로 일본을 떠난 의용병 일부는 한국과 국교가 없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재일조선인 의용병은 135명으로, 전사 사실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슬퍼할 기회조차 빼앗긴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재일조선인 의용병에게 적어도 그 당시 돌아가야 할 곳은 일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이 기다리는 일본으로 돌아간 의용병도 있었지만 연고가 없는 한국에 남을 수밖에 없어서 학업이나 취업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고생한 이들이 242명에 이르렀다. 6·25전쟁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널리 인정받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한국 내에서도 여전히 재일조선인 의용병에 대한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 이들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회자될 때가 많지만 그들이 참전 과정에서 얼마나 외면당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재일조선인은 한·일 관계, 북·일 관계, 그리고 남북 분단의 경계에서 농락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인식되지 않거나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안보상 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논쟁에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일본이라는 존재 또한 정치적 논쟁거리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은 직간접적으로 그 영향을 계속 받아 왔다.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된 2002년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하자 일본에서는 ‘북한 때리기’가 노골화되었고 그 화살이 재일조선인 커뮤니티를 향하게 되었다. 그 이후 일본 사회에 역사수정주의 대두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일본의 '우경화'가 두드러지면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증오범죄(hate crime) 등 ‘혐한(嫌韓) 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에 이르렀고 그 차별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재일조선인들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남북 통일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와 구세대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한다. 최근 세대 사이에서 남북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북한 주민이 같은 민족이라는 실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개인의 삶이 무엇보다 관심사이며 민족이나 평화 같은 큰 이슈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북 분단에 대한 관심은 정작 한반도에 살지 않는 재일조선인들에게 더 크다고 할 수도 있다. 2000년 김대중 정부 아래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재일조선인들이 있었고 최근에는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는 모습에 놀랐으며 이후 북·미 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건 것은 남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결국 하노이 북·미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지만 6・25전쟁 종전과 평화협정 체결을 바라는 마음은 재일조선인 또한 못지않거나 그 이상일지 모른다.
오가타 요시히로(緒方義広)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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