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정세에서 이란변수와 한국경제
지난 11일 외신들은 이란과 미국사이의 수감자 교환 협상 결과를 일제히 속보로 전했다. 양국에 억류되어 있던 수감자들이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협상 타결 소식만으로도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배경이 무엇인가. 미국과 이란의 화해가 가져다 줄 중동정세의 변화 가능성 때문이다. 우선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동결되어 있던 이란의 해외자산 일부가 해제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이란 관계의 결정적 걸림돌이었던 한국내 은행들의 이란 자금 반환이 협상 조건에 들어있다고 한다. 현재 IBK은행과 우리은행 등에는 무려 70억달러(약 9조 2천억원) 가량의 이란 자금이 묶여있다. 석유 수입 대금으로 받은 돈인데 우리의 이란 상품 수출대금과 상쇄해 왔지만, 수출보다 수입이 워낙 많은 터에 많은 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가 강화되면서 2019년 5월 이후부터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것도 국제법이나 유엔 안보리 결의안 같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미국의 일방적인 제재 때문이라 자국돈을 못받은 이란의 불만이 고조되어 왔다. 물론 이번 조치에는 가장 많은 이란 돈이 동결된 이라크와 유럽내의 해외자산 해제도 함께 협상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
현재 전반적인 중동정세는 미국에 불리하게 작동하고 있다. 세계 최대 에너지 패권국인 된 미국이 중동 원유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으면서 탈중동 정책을 뚜렷이 하면서 생겨나는 과도기적 힘의 공백 상태 때문이다. 미국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 개입했던 이라크, 시리아, 예멘,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모두 철수하면서 반미 벨트가 더욱 확산되어 가고 있다. 적대적 관계였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가 관계를 정상화하면서 시리아는 퇴출되었던 아랍연맹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미국이 침공했던 이라크 정권은 같은 시아파 이란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시켜 나가면서 끈질기에 자국정부가 동결하고 있는 이란 자금 해제를 미국측에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예멘내전에서도 후티 반군이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고 전쟁 당사자인 사우디와 휴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반세기 동안 든든한 협력적 파트너였던 사우디아라비아마저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본격화하고, ‘악의 축’ 이란과도 전격적으로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미국의 대중동 정책 기본 골격이었던 ‘친이스라엘, 반이란’ 구도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다급한 미국은 새로운 중동 전략축을 짤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 중 하나가 트럼프 대통령 시절 소위 ‘아브라함 협정’으로 다져놓은 온건 아랍국가와 이스라엘간 외교 관계 수립과 경제-군사동맹체 전략을 유지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반미국가들과의 극단적 관계를 상대적 유화관계로 돌려놓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아랍국가 설득과 이란의 핵개발 프로그램 투명성 보장 등이 확보되기 전에는 대이란 제재를 풀기는 어려울 것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45년째 계속되어온 뿌리깊은 반미 정서와 미국의 이란 위협론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극단적이고 소모적인 긴장관계에서 차가운 평화로 가는 의미있는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친미국가에서 반미국가로의 변신
이란의 대미 적개심과 불신은 두개의 사건이 갖는 깊은 역사적 맥락과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1953년 8월의 이란 총리 모사데크의 실각 사건이다. 그는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이란 하원 의원, 재무장관, 주지사, 외무장관 등을 역임한 이란내에서도 존경받는 슈퍼 엘리트 정치인이었다. 그는 석유라는 신의 은총이 왕실 가족회사와 영국 석유회사만 배불리는 불공정 구도에 반대하면서 일대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총리에 취임하자 마자 1951년 이란 석유를 독점하고 있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가 정부 요청안을 거부하자 곧 바로 이 회사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서구는 발칵 뒤집어졌고, 앙심을 품은 영국은 미국과 함께 CIA가 직접 개입한 친위 쿠데타로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다. 70년전 1953년 8월 19일의 사건이다. 국민이 선출한 정권을 자국의 이익만 채우기 위해 자행한 모사데크 정권 붕괴 쿠데타는 이란 국민들 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에 미국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과 불신감을 심어주었다. 많은 중동 전문가들은 1953년 미국과 영국이 획책한 모사데크 제거 쿠데타 사건이 오늘날 중동의 강한 반미의 뿌리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두 번째 양국 관계에 결정적 금이 간 사건이 1979년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과 연이은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하며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이다. 부패하고 세속적인 이란 팔라비 왕가를 뒤엎고 탄생한 이란 이슬람 혁명정권은 이슬람 율법과 도덕율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부패한 팔레비 왕정과 협력하고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던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표방했다. 특히 그해 11월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강제 점거한 혁명 세력들이 무려 444일간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는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회복 불능의 파탄 사태를 맞았다. 미국은 전방위 압박과 경제제재를 실시했다. 이란 핵에 대한 가혹할 정도의 사찰과 투명성을 압박해 갔다. 이란 경제는 점차 쇠약해갔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 졌다.
이러한 40년 상황으로 미국은 이란이라는 중동 최대 시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자 이란을 ‘악의 축’이나 ‘적대적 이해당사자’로 버리고 가는 것 보다는 화해와 관계 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인 미국의 중장기적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포괄적핵협상(JCPOA)을 전격적으로 타결했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합의했던 JCPOA 협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를 폐기했고, 양국관계는 다시 최악으로 치달았다.
오랜 대치와 증오의 당사국들이 적어도 극단을 피하고 차가운 평화 단계에 들어설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번 수감자 맞교환 협상에서도 중동 역내에서 가장 중립적이고 신뢰가 높은 오만의 새 술탄 하이삼과 카타르의 중재가 빛을 보았다. 중동의 아랍국가들이 적대적 대결구도보다는 이란과 함께 새로운 중동 평화질서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쪽은 이란 신정 정권일 지도 모른다. 45년 이란 혁명 정부의 절대절명의 생존 구호가 반미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과 이란은 그동안 서로의 필요에 의해 ‘적대적 공생’ 방식을 선호해 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이란은 제2 중동 붐의 견인차
미국와 이란의 화해 움직임은 한국의 이란 진출과 중동 시장 개척에도 절호의 기회다. 이란은 인구 8천8백만을 가진 중동 최대 시장이다. 그 중 30세 미만의 청년층 인구가 60% 이상을 차지하는 역동적인 인구구성을 갖고 있다. 대부분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하는 GCC 6개 국가의 자국민을 모두 합쳐도 이란 인구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란이 갖는 규모의 경제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것 같다. 인적 자원 이외에도 이란은 세계 4위의 원유생산, 세계 3위의 천연가스 생산국, 풍부한 지하자원,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 생산물은 물론 찬연한 1200년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문명을 간직한 나라다.
우리에게 이란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2011년 교역규모가 175억 달러로 1962년 수교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우리의 4대 원유수입국이고 이란으로써도 한국은 4번째 교역국가였다. 해외 건설 수주액에서도 이란은 5위권에 해당하는 주요 국가였다. 최근에는 한류열풍이 몰아치면서 대장금 시청율이 90%에 달했고 연이어 해신, 상도, 주몽 같은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란 국민전체가 ‘KOREA’ 브랜드에 열광하고 한국문화를 배우려는 열기로 가득하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나라다. 그런데 미국의 대이란 제재가 강화되는 2019년부터 교역이 급감하여 대이란 수입액은 2022년 1천100만달러로 사실상 교역이 끊기다시피 했다. 당장 교역 정상화는 어렵겠지만 건설, 플랜트, 철강, 자동차, 자동차 부품, 화학제품, 조선, 정유 부분을 중심으로 이란 시장 개척 재개를 위한 테스크 포스팀이 꾸려지고 본격적인 제2중동 붐을 준비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문화인류학 측면에서도 이란은 고인류의 전파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이고 5-6세기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신라와 긴밀한 교류와 접촉을 가져왔던 나라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일부 유리제품이 페르시아산으로 알려졌고, 신라인들의 페르시아 카펫 사용과 페르시아 여신이 새겨진 은제 그릇도 발견되었다. 또 이란인들의 신라진출을 기록하는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인 <쿠쉬나메>란 필사본이 해독되어 세계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물론 한-미동맹의 특수성 때문에 제재 중인 이란과의 정치-경제적 접촉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일수록 이란과의 문화, 스포츠, 학술 같은 비정치적 교류는 더욱 확대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국가 전략일 것이다. 15년 지속된 한류열풍으로 국민전체가 한국문화를 좋아하는 나라, 원유와 천연가스, 풍부한 자연자원, 깊은 페르시아 역사와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이란을 관리하고 친구로 받아들이는 작업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국내외 저서 9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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