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재조명] 한반도 국가 정통성은 대한민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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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논설주간
입력 2023-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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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④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박승준 논설주간
[박승준 논설주간]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쳤다. 독립협회의 ‘칭제건원(稱帝建元)’ 건의를 받아들여 국체를 입헌군주국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大韓國) 국제(國制)’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였고, 제2조는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대외 관계를 규정한 제9조는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 체결 국가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전·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소멸한 대한제국은 줄여서 ‘대한국’ 또는 ‘한국’으로 호칭됐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본제국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체포된 후 자신을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고 밝힌 것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친 후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1894년에 발발해서 1895년에 종결된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됐기 때문이었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승전국이 된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북양통상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서명한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그동안 조선이 청에 대해 해오던 전례(조공)는 앞으로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돼있었다.
대한제국은 국제 제6조에 따라 3명의 공사(지금의 대사)를 청에 파견했다. 박제순(1902~1903), 박태영(1903~1904), 민영철(1904~1905) 세 사람이었다. 청도 대한제국에 쉬서우펑(徐壽朋‧1898~1901), 쉬타이선(許臺身‧1901~1904), 쩡광취안(曾廣銓‧1904~1906) 등 3명의 공사를 파견했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가능했던 대한제국과 청의 대등했던 외교관계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종결됐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을 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되돌려 놓았다.
한일합병 9년 후인 1919년에 일어난 3‧1 만세운동은 국외에 모두 8개의 임시정부를 수립·선포하는 독립 열망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사 연구가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2019년에 펴낸 ‘3‧1혁명과 임시정부’에 따르면 조선민국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수립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채 전단(傳單)으로만 발표됐다. 실제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중국 상하이(上海)와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신익희·조소앙 등 각 지방 출신 대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의회)가 개최됐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가 선출됐다. 국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결정됐다. 국무원 수뇌부를 선출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10개조는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한다(大韓民國臨時憲章, 한국근현대사사전). 이 임시헌장은 그해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헌법(大韓民國臨時憲法)’으로 다시 공표됐다. 이 임시헌법에서 제3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구한국(대한제국)의 판도로 한다’고 명시하고 제7조에서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밝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분명히 했다.
임시헌장에 따라 국무총리로 발표됐던 이승만은 임시헌법 체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1925년 3월 7일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4월 7일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했다. 대한제국이 황제가 다스리는 양반상놈의 신분제 국가였다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은 남녀빈부와 계급이 없이 평등한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한 사건에 대해 ‘우남 이승만 평전 : 카리스마의 탄생’(이택선 저)은 “이승만은 국무총리나 집정관 총재 같은 각인되기 어려운 직함보다 대통령이라는 잘 알려진 호칭이 독립운동에 도움이 된다고 고집한 데서 빚어진 일”이라고 진단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기념 천장절 행사에서 일본군 장군들을 향해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를 현장에서 즉사하게 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癸)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을 거쳐 쓰촨(四川)성 충칭(重慶)으로 청사를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하이 푸단(復旦)대 조선한국연구소 소속 원로 교수 스위안화(石源華)는 2012년 한국에서 출간한 ‘한중문화협회 연구’에서 “항일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은 항일민족 통일전선이라는 전략 방침에 따라 한국 독립운동 각 당파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중국 공산당은 옌안(延安)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도와주는 한편 국민당 통치 지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다른 조직도 지원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1941년 10월 옌안에서 개최된 각 민족 반파시스트 대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명예주석으로 초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스위안화는 이 책에서 “1941년 10월 11일에 조직된 한중문화협회라는 한·중 공동 항일조직에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명예이사로 참여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소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귀국한 저우바오중(周保中)을 1933년 만주 지역으로 보내 항일민족 통일전선 전략에 따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조직하게 했다. 저우바오중에게 마오쩌둥이 맡긴 임무는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만주 지역에 병력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 민족 통일전선 역량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저우바오중은 현지에서 조선인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책을 발탁해서 1938년 6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정치부 주임으로 기용했다. 중국 공산당은 1936년 3월 남만주당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해 동북항일연군 제2군을 편성하고 제2군 정치위원으로 김일성을 임명한다. 김일성은 1937년 6월 8일 병력 15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일본 치하 보천보를 공격하는 유격활동을 벌이는 기록을 남겼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재미 정치학자 이정식 교수가 1983년에 펴낸 ‘만주에서의 혁명투쟁 : 1922~1945년 중국 공산주의와 소련의 이익’은 일본 방위청 통계를 인용해서 김일성이 1940~1941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일원으로 소규모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김일성이 1941년 소련 연해주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군에 편입된 이후 상황은 재미 정치학자 서대숙 교수가 1988년에 출간한 ‘Kim Il Sung : the North Korean Leader'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저우바오중의 ’동북항일유격일기‘에도 이 부분이 기록돼 있다. 1992년 4월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 소속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한 기록이 나오지만, 기록은 1936년에서 그쳤고 1941년 소련 극동군으로 소속을 바꾼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던 1992년에 이미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된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학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가 2013년에 미국 뉴욕에서 출판한 ‘The Real North Korea : Life and Politics in the Stalinist Utopia’에는 30대인 김일성이 1945년 9월 소련 군함 푸가체프(Pugachev)호에서 소련 육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내렸으며 김일성 직책은 소련군 제88 독립여단 제1 조선인 대대 지휘관이었다.
이택선 교수가 쓴 ‘우남 이승만 평전’에 따르면 미국에 머물고 있던 70세의 이승만은 10월 4일 미군 인사들의 협조로 귀국 허가를 받았고 하와이와 괌을 경유해서 도쿄(東京)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 들러 맥아더를 만난 다음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대한제국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보다 한 달 늦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했으나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대통령에는 선거에서 당선된 이승만이 취임했고,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권총으로 암살당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1987년에 마지막으로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 첫 구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가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3‧1운동 영향으로 탄생한 대한제국의 계승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인정받지 못했고 미군은 한국인 최초의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이승만을 선택하고, 소련군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소련 육군 대위 김일성을 통치자로 선택했다.
조선을 국호로 선택한 김일성은 조선왕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전제국가를 한반도 북쪽에 건설해 놓았고, 권력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했던 카리스마의 지도자 이승만은 헌법 전문에 ‘4‧19 정신이 항거했던 불의’로 기록됐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소멸한 대한제국의 법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에 한반도 유일합법 정부의 정통성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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