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줄여서 민주평통 또는 ‘평통’이라고도 부른다. 민주평통은 민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 수립과 추진에 관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자문에 응하는 헌법 기구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헌법 최고기구였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가 되었다가 1987년 현재 명칭이 되었다. 지난 9월 1일부로 임기 2년인 제21기 자문위원회가 출범했다.
민주평통 자문위원은 지방 유지(有志)나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대통령을 자문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개인적 명예와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일까. 해외에 있는 동포들은 국내에서 개최되는 민주평통 전체회의에 초청을 받으니 겸사겸사 고국을 방문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자문위원이 되면 본인이 하기에 따라 지역 인맥을 쌓는 데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이를 기대하고 위원이 되려는 사람도 많다. 물론 자문위원은 순전히 명예직일 뿐이며 활동비나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자문위원이나 지역 임원이 되는 것이 큰 자리를 얻는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문제는 따로 있다. 민주평통이 대통령에게 평화통일에 대해 자문을 하는 기구지만 그런 역할은 정작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런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도 비교적 오랫동안 상임위원과 거주지역 자문위원을 지낸 바 있다. 2년간 ‘경제협력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적도 있다. 그러나 위원회에서 만든 건의안이 국정의 정책으로 반영·채택된 사례는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정한 통일·대북정책을 민주평통 위원회가 그대로 답습하거나 그 바탕 위에서 세부 추진 방안을 만드는 정도였다. 이는 민주평통이 대정부 편향적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정부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종만 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소위 보수·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 것으로 평가된다. 일종의 정부 전위대(前衛隊) 같은 역할을 하다 보니 의장인 대통령은 민주평통을 자신과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기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정권이 바뀌면 위원들 색깔이 달라진다. 진영 논리에 따라 대폭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번에 출범한 제21기도 마찬가지다. 지난 제20기보다 1000명 정도 늘어 2만1000여 명이 위촉되었지만 운영위원과 협의회장은 90%, 상임위원도 77% 교체됐다. 국내외 부의장 23명은 전원 '물갈이'되었다. 민주평통 위원들이 대부분 자천 또는 타천을 통해 발탁되지만 대부분 심사 과정을 통해 정권 성향에 맞는 사람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민주평통은 그전에 볼 수 없었던 대정부 편향적 자리매김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 민주평통 사무처장은 취임 전부터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참신하고 국가관이 뚜렷한 윤사모 회원들도 많이 등용하겠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실제 문재인 정부 당시 위촉된 몇몇 분과위원장들이 임기 도중 사직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과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처장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본연의 역할을 외면하고 윤 대통령 인식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큰 문제다. "안보에 도움이 된다면 친일파가 되겠다"고 한다든가 “일본에 반성이나 사죄 요구도 이제 좀 그만하자.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중 사죄·배상하라고 악 쓰는 나라 한국뿐"이라는 사무처장 말은 공공외교를 선도하는 자리에 있는 공인으로서 할 말인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윤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칭송한 발언은 민주평통이 현재 어떠한 위치에 처해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알게 하고도 남는다. 김관용 수석부의장은 ‘제21기 민주평통 간부위원과의 통일 대화’에서 "시커먼 먹구름 위에는 언제나 빛나는 태양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먹구름을 걷어내고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구국의 지도자, 우리 민주평통 의장이신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같은 민주평통 수장의 인식이 민주적 평화통일정책을 독자적으로 자문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할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평통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 그 존재가치를 새롭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민주평통은 한반도에서 '남북 2국가 체제'에 대해 선호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상당히 흥미 있는 내용이 도출되었다. 일반 국민 응답자 중 52%가 남북의 바람직한 미래상으로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2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반면 ‘단일국가’라는 응답은 그 절반 수준인 28.5%로 집계됐다. 그 밖에도 ‘1국가 2체제’나 ‘현재와 같은 2국가’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각각 9.8%, 7.9%였다. 통일 필요성에 대해서도 73.4%(매우 필요 38.4%, 어느 정도 필요 35.4%)가 동의했으며 필요하지 않다는 답은 25.4%에 그쳤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 국민 대다수는 통일을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보다 먼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두 체제의 남북한 관계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을 말한다. 통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응답자들은 ‘경제발전'(30.9%) ‘전쟁 위협 해소'(25.8%) ‘민족의 동질성 회복'(17.8%) ‘국제적 위상 강화'(12.4%) ‘자유와 인권 실현'(11.2%) 등 순으로 답했다. ‘경제 발전’과 ‘전쟁 위협 해소’는 남북한 교류협력을 통해 가능하며,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윤 정부가 크게 강조하고 있는 인권 문제는 사실상 후순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론조사는 한마디로 우리 국민의 통일과 미래 남북 관계에 대한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게 한다. 동시에 민주평통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내년도 민주평통 예산은 통일부 예산이 22.7%나 크게 줄어든 데 비해 소폭이지만 2% 정도 늘어났다. 예산 증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다. 이제부터라도 민주평통은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남북 관계’의 바탕을 마련하고 이를 정책으로 구체화해 정부가 실천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자문·건의해야 할 것이다.
김영윤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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