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money)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고 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과거 화폐 단위인 '환' 역시 "고르게 잘 통한다"는 뜻으로, 순환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현재 쓰고 있는 단위인 '원'도 둥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돈은 돌고 돌아야 돈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돈은 거름과 같아 뿌리지 않으면 썩기 쉽다"고 말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돈을 거름으로 써 사회에 꽃을 피운 이가 세상을 떠났다. 92세 나이로 숨을 거둔 세계적 면세점인 DFS의 공동 창립자 찰스 퍽 피니의 이야기다.
미국 억만장자인 그는 전 재산 80억 달러(약 10조8000억원)를 사회에 환원하고 샌프란시스코의 방 두 칸짜리 소형 아파트에서 눈을 감았다. 살아있는 동안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피니가 세운 자선재단 애틀랜틱 필랜스로피스(Atlantic Philanthropies)는 9일 "피니가 92세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밝혔다. 그의 사망 소식은 지난 2020년 전 재산을 기부한 뒤 재단을 해체하겠다고 밝힌 지 3년 만에 전해졌다.
앞서 피니는 은퇴 후 노후 생활을 위해 남겨 놓은 200만 달러(약 27억원)를 제외하고 평생 모은 전 재산 약 80억 달러를 사회에 내놓았다. 기부금의 구체적인 사용 내역은 피니가 수학했던 △코넬대 10억 달러 △교육 부문 37억 달러 △사형제 폐지(7600만 달러)를 포함한 인권과 사회변화 8억7000만 달러 △건강관리 7억 달러 △오바마헬스케어 지지 7600만 달러 등이다.
평생 일군 재산을 손에서 떠나 보낸 그의 소감은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였다. 그는 지난 2020년 기부를 마무리하며 "생전에 목표를 이뤄 매우 만족스럽고 좋다"며 "내가 진짜 살아있는 동안 전 재산을 기부할지 궁금해했던 사람들에게는 '해봐라, 정말 좋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부계 '제임스 본드' 찰스 퍽 피니···빌 게이츠·워런 버핏에게도 영감
그의 이름 앞에 '기부왕'이란 수식어가 붙었지만, 사실 그의 기부 활동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졌다. 하지만 지난 1997년 면세점 사업체 DFS 지분을 루이비통모엣헤네시(LVMH)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회계장부가 공개됐고 이때 그의 기부 사실이 우연히 공개됐다. 그가 자선활동계의 '제임스 본드'로 불리게 된 순간이다.
피니는 기부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기부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런 그의 활동은 세계적인 자선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를 이끄는 워런 버핏에게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버핏은 피니를 두고 "기부 활동에 큰 영감을 준 기념비적 인물"이라며 "그가 평생에 이룬 업적은 내가 죽고 나서도 12년의 세월이 더 걸릴 정도로 위대하다"고 말했다.
피니는 기부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기부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런 그의 활동은 세계적인 자선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를 이끄는 워런 버핏에게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버핏은 피니를 두고 "기부 활동에 큰 영감을 준 기념비적 인물"이라며 "그가 평생에 이룬 업적은 내가 죽고 나서도 12년의 세월이 더 걸릴 정도로 위대하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가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국내에서도 돈을 거름 삼아 사회에 열매를 맺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지난 2020년 "노벨상 인재를 키워 달라"며 평생을 일궈 모은 재산 676억원을 카이스트(KAIST)에 쾌척했다. 이는 카이스트 개교 이래 최대 기부액이다.
당시 이 회장은 "어느 대학도 해내지 못한 탁월한 성취를 이뤄내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일에 이 기부가 뜻깊게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앞서 이 회장은 같은 해 9월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서남표 카이스트 전 총장의 연설을 듣고 ‘우리나라에 과학자의 필요성, 과학 발전과 국력’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내 마음을 흔들었다”며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는데 우리는 아직 배출하지 못했다”고 기부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돈을 버는 데는 천사처럼 할 수 없어도 쓰는 데는 천사처럼 하겠다."
고(故)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은 이 같은 철학으로 지난 2000년 6월 장학재단을 설립해 지난 23년간 장학생 1만2000명에게 총 2700억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1958년 삼영화학공업사 창업 후 10여개 회사를 계열사로 둔 삼영화학그룹으로 발전시킨 이 전 회장은 지난 2008년 자서전 '정도(正道)'를 통해 장학사업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은 나를 바보라 할지 모른다. 그것은 베풂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라며 "인생은 어차피 '공수래공수거'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가 손을 채운 다음 갈 때는 빈손으로 가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나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 전 회장은 1958년 플라스틱 양동이 등을 만드는 삼영화학공업사를 창업해 삼영중공업 등 10여개 회사를 계열사로 둔 삼영화학그룹으로 발전시켰다. 이 전 회장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기부왕'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자수성가형 벤처 창업자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에 이어 김봉진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의장도 재산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당시 그가 보유한 우아한형제들과 우아DH아시아 지분 가치의 절반은 약 1조 3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앞서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피니의 기부 활동을 '롤모델'로 삼은 것처럼 김 의장 역시 두 사람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김 의장은 비영리기구 더기빙플레지와의 기부서약문을 통해 "10년 전 창업 초기 20명도 안되던 작은 회사를 운영할 때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기사를 보면서 만약 성공한다면 더기빙플레지 선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꿈꾸었는데 오늘 선언을 하게 된 것이 무척 감격스럽다"며 "2017년 100억원 기부를 약속하고 이를 지킨 것은 지금까지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이제 더 큰 환원을 결정하려 한다"며 기부 배경을 밝혔다.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 이사회 의장 역시 같은 해 재산 절반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환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김 의장이 보유한 자산 가치를 고려하면 기부 규모는 5조원 수준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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