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반도체 왕국'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일본의 광폭 행보가 거침없다. 반도체 소재·부품· 장비(소부장) 경쟁력을 앞세워 한국 시장 텃밭인 메모리와 차세대 먹거리인 파운드리, 전장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적 사활을 거는 모습이다.
이미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세계적인 기업을 보유한 한국이 안도감에 취해 적절한 투자 시기를 놓칠 경우, 미국·대만은 물론 일본에게도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23일 관련업계·외신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국가보조금, 세제혜택, 부동산 규제해제 등 다양한 지원책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공장 유치에 공들이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최근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3조4000억엔 규모의 예산을 추가 편성했다. 2020년 편성한 2조엔에 이어 역대급 투자 규모다. 이 자금은 반도체 생산개발 지원 등을 위한 '포스트 5G 정보통신시스템 연구' '특정반도체 기금' '안정공급확보지원기금' 등 3대 분야에 쓰일 예정이다.
실제 일본 신생 반도체기업인 라피더스, 대만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TSMC 등은 정책 지원금의 막대한 수혜를 받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현에 TSMC 공장 2개를 유치하기 위해 약 1조4000억엔을 쏟아부었다. 이곳에서는 6나노(nm·1나노는 10억분의 1m), 12나노 반도체가 양산된다. 라피더스 역시 9300억엔 이상을 지원받아 2027년부터 삼성전자와 경쟁할 첨단 2나노 반도체를 생산한다.
최근에는 메모리시장 경쟁력 확보에도 적극적이다. 일본 반도체업체 키옥시아는 미국 WD(웨스턴디지털)의 반도체 메모리사업을 분리해 키옥시아홀딩스와 경영을 통합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기준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WD의 점유율은 14.7%로 4위다. 키옥시아 점유율(19.6%)과 합치면 34.3%로, 업계 1위인 삼성전자(31.1%)를 단숨에 넘어선다. 일본 반도체 궐기를 총지휘하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앞서 "관, 민, 국제협력을 동원해 '반도체 대국'을 복원하고 공급망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반면 한국은 2024년 반도체 산업 지원에 편성됐던 수천억원대의 예산이 전액 삭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단 적인 사례가 용인, 평택 반도체 클러스터 인프라 지원 사업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3~2027년까지 해당 사업에 2조7407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정부가 재정부족을 이유로 예산을 전액 삭감해 투자집행률이 50%를 밑돌 것으로 예상된다.
양향자 한국의희망 의원은 "정부가 올해 용인, 평택 반도체 인프라예산 3884억원을 예산부족 이유로 전액 삭감한 데 이어 내년에 편성된 예산 3348억원도 전부 삭감했다"면서 "정부 인프라 지원 예산을 믿고 투자한 기업들은 뒤통수를 맞은 심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글로벌 첨단 기업들이 한국투자에 망설이고 있는 만큼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투자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한국이 되풀이할까 우려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특유의 폐쇄적 문화가 있는 일본이 외국 기업에 돈을 주면서까지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과거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반도체 부활을 위해 뿌리까지 바꾸면서 무섭게 돌격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일본은 막대한 국부유출을 각오하고 TSMC 등 외국 기업을 유치하는데 한국은 자국에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이 있는데도 지원에 왜 이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면서 "반도체 업사이클이 본격화되고 첨단 기술을 향한 초격차 경쟁이 가열되는 과정에서 자칫 적절한 투자시기를 놓치면 한국의 경쟁력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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