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어느 날 법률사무소에 들렀더니 이돈명 변호사가 떡을 내놓으며 ‘여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떡이네. 먹어보소’라고 했다. 배가 고팠던 터라 맛있게 먹긴 했지만 흔한 백설기였다. 그런데 이 변호사가 말하기를 얼마 전 시골 출신 학생의 변론을 맡았는데 그 부모가 찾아왔더란다. 가난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촌사람이었다고. 자식이 다닌다는 서울대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 모르고 살 정도였다. 자식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을걷이가 우선인지라 가지 못하고 가을걷이부터 하고 부랴부랴 온 것이다. 아들의 변론을 이돈명이라는 사람이 해 줬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줘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고마운 선생님한테 뭘 해줄까 고민하다 시골에서 떡을 해 들고 난생 처음인 서울길을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한다. ‘어때, 세상에서 제일 귀한 떡 아닌가?’하시며 눈물을 글썽이는데 나는 그 떡을 귀하게 여기는 변호사님의 마음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추모단체연대회의 의장을 지낸 헌쇠 박중기의 말이다.
1979년 가톨릭농민회 사건 때는 고문에 못 이긴 의뢰인 오원춘이 법정에서 검찰이 시킨 대로 거짓 증언을 하는 바람에 그를 돕던 변호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왔다. 이돈명도 그중 한 명이다. 그와 70~80년대 고락을 함께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재판을 마친 후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돈명이 중앙통로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민청학련 사건 맡으면서 인권변호사 길 걸어
이돈명(1922~2011)은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그의 나이 쉰둘이었다. 당시 그의 회고를 보자. “황인철 변호사와 홍성우 변호사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전에 친분은 없었다. 그러다 민청학련 사건이 생기자 그들을 찾아가 사건 경위, 재판에 참여하게 된 동기, 재판 진행 과정을 들었다. 그리고 나 또한 유신정권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부 활동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변론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은 내 의사를 매우 반가워했고, 이후 모든 시국사건을 거의 함께했다.”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인혁당사건, 김지하 반공법 위반사건, 청계피복 노조사건, 동일방직사건, YH 사건, 통혁당재건기도 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학림 사건, YWCA 위장결혼사건, 광주 사건, 미 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오송회, 한울회, 금강회 그리고 아람회사건 등 70년대 이후 중요한 사건의 현장마다 그가 있었다.
‘인권변호사 4인방’의 맏형
1970년 후반 들어 이돈명은 ‘인권변호사들의 맏형’으로 불린다. 시국사건이 터지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인권변호인단의 분배, 변론준비, 피고인 접견을 지휘했다. 당시는 극심한 격동기였다. 박정희의 장기집권 야욕은 필연적으로 국민들 저항을 불러왔고 박정희는 그 저항을 압살하기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긴급조치를 발령했다. 짓밟는 힘이 거세질수록 저항의 힘도 거세지는 법. 수많은 국민들이 고문, 투옥됐고 변호사들의 도움도 절실해졌다. 여기서 ‘인권변호사 4인방’이 탄생한다.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다. 시국사건이 있는 곳에는 꼭 그들이 있었다. 시국사건 당사자들 싸움이 결코 외로운 싸움이 아니며 설사 사형을 언도받더라도 그들의 행위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동지이자 격려자였다.
가인(佳人) 김병로 ‘가장 존경하는 법관’
이돈명은 스스로 자신의 호를 범하(凡下)로 지었다. 평생 보통사람 이상으로 잘나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 남보다 두드러지지 않되 의(義)를 지키고 사는 것, 아마 이것이 그가 평생 지니고 싶었던 모습이 아닐까. 그를 두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소박하고 평범하되 위대하다. 이돈명은 우직함과 소박한 애정으로 ‘칼끝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양심수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었다.
이돈명은 법관이 가져야 할 기본조건으로 ‘3가지 소금’을 말했다. 지혜의 소금, 양심의 소금, 용기의 소금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빠뜨려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식이 있으나 양심이 없어서는 안되고 양심은 있으되 지혜가 없으면 안된다. 그리고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더라도 용기가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돈명이 가장 본받을 만한 법관으로 꼽은 사람은 가인(佳人) 김병로(1888~1964)다. 그가 사법부에 발을 들여놓을 때 대법원장이었다. 가인은 정부수립 초기에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사법부 독립과 법조인 양심을 지켜냈다. 한국 법조인의 ‘모범’이자 ‘기둥’이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독립운동가들 변론에 앞장선 이들이 많은데 가인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독립투사의 무료변론을 자청해 전국을 뛰어다녔다.
보통사람으로 가장 정당한 길을 간 사람
이돈명은 ‘유죄변호사’로 불렸다. 시국사건 때 학생이나 정치범들은 그를 찾았다. 그가 암만 열심히 변론해도 무죄를 때려주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나면 그를 찾아와 변호를 부탁했다. 이돈명은 “그래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다”고 했다.
인권변호를 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1974년 일이다. 그해 3월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 ‘고행(苦行)...1974’에서 인혁당 사건은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곧바로 반공법 위반으로 재구속됐다. 며칠 후 인혁당 관계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데 이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다. 살벌한 때였다. 이돈명과 민청학련 사건을 함께 맡았던 변호사들도 몸을 사리며 김지하 변호를 꺼렸다. 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면서 인권변호사들이 잇따라 수난을 당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내가 변호인이 아니라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해 저 피고인석에 앉아있겠다”고 말해 투옥됐고 홍성우 변호사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1975년에는 김지하 사건 수임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인권변호사의 대표격인 이병린 변호사를 구속했다. 이 와중에 이돈명이 김지하 변호에 나섰다. 모두 놀랐다.
그는 5·3인천사태에 관련해 수배를 받았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1986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이부영을 숨겨준 것은 이돈명이 아니라 동료 변호사인 고영구였다. 고영구의 노모와 와병 중이던 부인이 받을 충격을 염려해 자신이 숨겨준 것으로 이부영 등과 짜고 거짓 자백한 것이다. 이부영은 “선생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감옥생활을 했는데도 그 사건 이후 만나자마자 ‘이 사람아, 자네 덕분에 나도 이제 진짜 민주투사가 됐네’라며 껄껄 웃었다”고 전했다.
소탈하고 해학 넘쳐 주변 즐겁게 해
이돈명을 처음 본 사람은 그를 상당히 근엄한 사람으로 착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소탈하고 기지와 해학이 담긴 말로 주변을 즐겁게 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아첨은 남이 보기에 안 좋지만 받아보면 좋은 것이네”라고 했다. 짓궂은 면도 있다. 아는 사람 중에 지나치게 폼을 잡는 이를 은근히 놀려준 일화가 있다. “여보게. 자네가 정씨 성을 쓴다며? 정씨라면 나도 좀 알지. 우리 집안에서 혼인도 하고 했으니. 하나는 기성공파(奇聲公派. 당나귀가 갑자기 놀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른다는 뜻), 하나는 타복공파(打腹公派 한가하면 늘어진 성기가 배를 툭툭 친다는 뜻), 또 하나는 장이공파(長耳公派 당나귀는 귀가 길다는 뜻)로 대부분 여기에 속하지. 대단한 양반들인데 자네는 어디에 속하나?” 그러자 그 사람은 오랜만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나는 장이공파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돈명은 씨익 웃으며 “아, 자네가 그렇구만” 했다는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 세례명 ‘토머스 모어’
이돈명은 1922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회두마을에서 태어났다. 1950년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년 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지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법관직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법복을 벗었다. 1963년 다른 세 변호사와 함께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민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서울변호사회 부회장,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회장, 국민운동중앙본부 의장,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사장, 조선대총장을 지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유신에 반대하며 농성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큰 감동을 받아 그 길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한 함세웅 신부는 “선생이 종종 성당에 와서 신부들에게 법과 정의에 대해 날카로운 강연을 해주셨다. 그렇게 냉철한 분이 ‘주일 미사를 빼먹었다’며 어린아이처럼 수줍게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재밌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돈명은 김수환 추기경과 광주대교구장인 윤공희 대주교 등 많은 신부들과 교류했다.
그는 2011년 노환으로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천주교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인권변호사였다. 불의에 짓밟히면서도 어디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 가난이 제 탓만이 아닌 사람들의 벗이었다. 스스로 낮은 사람이라 자처하면서 죄인이 돼 감옥을 마다하지 않았던 지인(至人)이었고 더불어 사는 지혜와 겨레가 함께 가야 할 길을 일깨워 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참고서적 : ‘한국가톨릭인권운동사’(명동천주교회.1984) ‘1970년대,1980년대 민주화운동’(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987) ‘돈명이 할아버지’(간행위원회.2004) ‘이 사람을 보라’(김정남.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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