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992→2023 'LA 폭동'의 기억… 이야기가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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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훈 인턴 기자
입력 2023-11-0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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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덜위치 칼리지 서울영국학교 이사 주한미상공회의소 여성위원장
[조남주 덜위치 칼리지 서울영국학교 이사/ 주한미상공회의소 여성위원장]



“부당한 인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주류 사회에 관해서는 특히 그렇죠. 한 번 자리잡은 오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거든요.”
 
파도가 몰아치면 조각배는 휩쓸리는 수밖에 없다. 대변자가 없는 소수집단에 대한 인식은 주류 사회가 떠미는 대로 이리저리 치이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차별과 편견들이 끊임 없이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덜위치 칼리지 서울영국학교의 마케팅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조남주 이사는 평소 다양성과 배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 이사는 전직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기자로 소수집단을 돕는 다양한 NGO에서 활동해온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다양성에 관한 존중와 화합은 그녀의 철학을 넘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같은 깨달음을 주었을까? 최근 인터뷰에서 기자의 물음에 조 이사는 LA 폭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 이사는 LA 폭동 당시 주류 언론의 왜곡 보도에 대응해 한인들이 처한 실상을 대중에 알리는 역할을 자처했다.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녀는 LA 사태의 충격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고 전했다.
 
“LA 사태 당시 저는 미국 UCLA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 상황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입장이었죠.”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거대한 폭동이 일어났다. 흑인 ‘로드니 킹’을 과잉 폭행한 백인 경찰들이 연방정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자, 인종차별에 억눌린 불만이 폭력 사태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LA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해당 사건은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LA 폭동의 열기는 주변을 휩쓸었으며, 그 중심에는 한인 사회가 있었다. 당시 미국 사회의 치안을 지키는 경찰이 LA의 한인타운을 사실상 방치한 것이었다. 폭동의 격정에 한인들은 그대로 노출되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저는 TV 뉴스를 통해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특히 초기에는 현장 상황이 매우 편파적으로 보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경찰이 부유한 베벌리힐스 쪽에 파견되었고 한인 타운과 저소득층이 주로 모여있는 LA 남중부 지역에는 경찰이 파견되지 않았어요. 그곳의 상인들은 가게를 보호하기 위해 직접 총기를 들 수밖에 없었죠.”
 
조남주 이사가 당시 사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녀가 주목한 부분은 당시 주류 언론의 반응이었다. 한인 사회가 자경단을 구축해 폭동에 대처하기 시작하자 주류 매체가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고 조 이사는 회상했다. 백인 주류사회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폭동이 순식간에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 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것이었다.
 
“언론에서 다뤄지는 건 단지 한인들이 총기로 무장해 싸우는 장면들이었어요. 한인들이 입은 피해라든지, 이민 1세대 한인들이 겪는 어려운 상황들을 거의 다루지 않았죠.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만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뿐이었어요.”
 
조 이사는 LA 사태가 소수 민족 간의 갈등으로 둔갑되는 것에서 위화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흑인과 한인의 싸움’이라는 선정적인 보도가 주가 되며, 보다 근본적인 인종차별 이슈는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것이었다.
 
“한인들이 총기를 난사하고, 폭력을 조장한다는 인식까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상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무장한 것이었는데도요. 부당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사태 발생 직후에는 한인사회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거의 없었어요. ABC 방송국에서 ‘안젤라 오’ 변호사가 한인들을 대변하는 인터뷰를 진행한 게 유일하다시피 했죠.”
 
왜곡된 인식은 뒤틀린 흐름을 만든다. 한인과 흑인 간의 ‘한흑갈등’이 주류 매체를 휩쓸었고,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 사이 갈등도 고조되기 시작했다. 부당한 편견이 한인 사회를 뒤흔들던 상황에서 조 이사가 선택한 역할은 파묻힌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는 일이었다.
 
“당시 저는 친구들과 함께 UCLA 내 아시아 잡지사에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한인 사회가 주류 언론에 부당하게 비춰지는 것을 보고, 주류 매체에서 다루지 않은 상인들의 목소리가 담긴 특별 이슈를 공동 편집하기로 했어요. 그게 제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조 이사는 한인 사회를 대변하던 ‘안젤라 오’ 변호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한 한편 LA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던 한인 상인 부부와의 인터뷰를 기사에 실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폭동으로 인해 운영하던 장난감 가게가 불타 전재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 이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자녀들이 더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이민을 결심한 부부였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수십년 동안 밤낮없이 일하고, 마침내 가게를 갖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랬던 공간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린 거죠.”
 
난 데 없는 폭력에 일상을 잃고 평온을 상실한 이들의 이야기, 그것이 미디어 너머에서 조 이사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사건 발생 당시엔 주류 매체에서 이들같은 이민 1세대의 어려운 상황을 거의 다루지 않았어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정보에 휩쓸려 진정 들어야할 목소리가 묻혀버린 거죠.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어요. 그 때까지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의미니까요.”

조 이사가 특히나 주의했던 부분은 ‘스토리텔링’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단순히 데이터나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믿었다. 이야기는 이해의 기반이 되며 화합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주류 사회가 부당한 인식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저희는 한인들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걸 멈추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 믿었고, 제가 그 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죠. 한인 사회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여러 오해와 편견들이 차츰 불식되어갔어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도 존재하지만, LA 사태의 아픔을 화합과 연대로 극복해나가고 있죠.”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며 LA 사태는 현재 31주년을 맞이했다. 당시 총을 들고 싸운 한인들은 지금 ‘무장세력’이라는 오명 대신,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분투했던 한 명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린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이젠 한인 축제인 ‘코리안 퍼레이드’가 LA에서 열리고 있어요. 흑인, 히스패닉, 백인 등 자신이 속한 문화나 집단과 상관없이 모두가 어우러지는 자리예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서로를 존중해나가는 화합의 장이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변화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겠죠.”
 
LA 사태를 생생히 경험한 이후, 조 이사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Cast LA(coalition to abolish slavery and trafficking, 가정폭력 및 인신매매 피해자를 돕는 단체) 등 비영리 단체에서 소수집단을 돕고 그들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현시대를 사는 사회적 약자들 역시 세상의 부당한 인식에 휩쓸려간다는 점에선 LA 폭동 당시 한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어느 사회든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지도 모르죠. LA 사태처럼 거대한 사건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곳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범죄들도 많으니까요.”
 
세상엔 여전히 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그로 인한 갈등이 존재한다고 조 이사는 설명했다.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만큼 다양한 편견과 갈등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도울 수 있다면 즐거울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세상에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기회를 줘야한다고 믿어요. 부당한 인식에 맞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공감을 이끌고, 변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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