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연합(EU) 등이 인공지능(AI)·신약개발·유체역학 등 미래 기술 연구개발을 위해 슈퍼컴퓨터(HPC) 경쟁력을 지속 강화하는 가운데 한국만 뒤처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네이버가 세계 20위권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공개하며 분투했지만, 정작 정부의 차세대 슈퍼컴퓨터 구축 계획은 예산에 발목이 잡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을 집계하는 톱500 재단이 올해 하반기 슈퍼컴퓨터 성능 집계 결과를 전날 공개했다.
네이버가 미국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와 협력해 구축한 슈퍼컴퓨터 '세종'은 초당 32.97페타플롭스(PF)의 성능을 기록, 전 세계 22위를 기록했다. 플롭스란 슈퍼컴퓨터 성능을 측정하는 단위로, 시뮬레이션과 기계 학습에 필요한 부동소수점 연산을 초당 몇 회 처리할 수 있는지 나타낸다. 1PF는 1초당 1000조번의 부동소수점 연산을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올해 상반기까지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슈퍼컴퓨터는 삼성전자 'SSC-21(25.19 PF)'이었으나, 네이버가 자체 초거대 AI '하이퍼클로바X' 학습 속도를 끌어올리고자 슈퍼컴퓨터의 AI 반도체 규모를 두 배 확대하면서 순위가 바뀌었다.
세종은 슈퍼컴퓨터가 위치한 지역명(세종)이자, 한글 데이터 생성과 확산에 전환점을 마련한 세종대왕 뜻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세종은 엔비디아 AI 반도체 ‘A100’ 2240대를 퀀텀 인피니밴드 I/O(입출력)로 연결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설계·구축·운영 전 과정에서 엔비디아와 협력하는 게 특징이다.
이상준 네이버클라우드 최고정보책임자는 "최근 슈퍼컴퓨터가 AI 주도권 확보를 위한 필수 인프라로 인식되면서 국가와 기업의 기술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로 자리 잡고 있다"며 "글로벌 수준의 슈퍼컴퓨터를 기반으로 회사의 AI 기술 경쟁력을 더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세종 외 7개의 슈퍼컴퓨터 경쟁력은 나란히 하락했다. 톱500 재단 조사 결과를 보면 △삼성전자 SSC-21은 20→28위 △기상청 '구루'와 '마루'는 각각 37·38→47·48위 △SK텔레콤(SKT) '타이탄'은 47→59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국가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은 49→61위 △KT 'DGX 슈퍼팟'은 58→72위 △광주과학기술원(GIST) '드림-AI'는 207→244위로 밀렸다.
업계에선 한국의 슈퍼컴퓨터 경쟁력이 하락하는 이유로 2018년 상반기 누리온의 구축 이후 국가 주도 대규모 슈퍼컴퓨터 구축 프로젝트가 없었던 것을 꼽는다. 구축 당시 누리온은 세계에서 11번째로 빠른 슈퍼컴퓨터였지만 이제는 6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초거대 AI 열풍으로 삼성전자·네이버·SKT·KT 등 민간 기업이 슈퍼컴퓨터 확보에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종합 경쟁력이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을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설상가상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하는 국가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 사업은 AI 반도체 가격 폭등이라는 암초를 만나 4번 연속 유찰되는 수모를 겪었다. 글로벌 기업들은 정부가 제안한 2000억원대 예산으로 600PF급 슈퍼컴퓨터를 구축하는 것은 어렵다며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정부는 최대한 빠르게 슈퍼컴퓨터 6호기를 구축하기 위해 추가 예비타당성조사 없이 관련 예산을 최대 15% 증액하는 방안을 두고 고심 중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기획재정부 등 재정당국과 협의해 슈퍼컴퓨터 6호기 구축 사업 계획을 변경할 예정이다"고 전했다. 이어 "미국·영국·EU처럼 특정 슈퍼컴퓨터 업체와 파트너십 계약을 맺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공공조달법상 어렵고, 경쟁 입찰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2위에는 미국 국립 아르곤연구소의 '오로라(585.34 PF)'가 새로 이름을 올렸다. 인텔의 차세대 AI 반도체 '데이터센터GPU 맥스'로 만들어진 오로라는 시스템의 절반만 가동했음에도 높은 성능을 보여, 시스템 전체가 가동될 경우 차기 세계 1위 등극이 유력시된다. 3위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초거대 AI '코파일럿' 학습을 위해 도입한 '이글(561.20 PF)'이 차지했다. 엔비디아 AI 반도체 'H100'을 활용해 초거대 AI 학습에 특화해 설계한 제품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