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년 5월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1347~1391)는 나주와 목포항에 머물던 전함을 앞세우고 남해 관음포를 향하고 있었다. 왜구의 배 120척이 경상도 해안을 마구 약탈하고 남해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출진하기 전날 밤 정지는 지리산 산신(山神)에게 기도를 올렸다. “나라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하늘이시여! 우리가 필승하도록 도와주소서.” 비장하게 결심한다. 가까운 합포에는 이미 사졸을 징집해 부대를 편성해 뒀고 전함 27척도 갖췄다. 관음포에 이르자 그물망을 좁혀가듯 진을 꾸리고 대포와 불화살을 퍼부었다. 왜구의 배 100여 척이 불탔고 왜구들은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몰살했다. 고려군의 대승이었다. ‘관음포 대첩’이다. 우왕이 어주(御酒)를 하사하자 요즘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인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는 병사들과 함께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며 말했다. “내가 말을 타고 육지에서 수많은 적을 격파했지만 오늘과 같이 통쾌하게 승리한 적은 없다.”
왜구를 상대로 해상전투에서 거둔 고려 수군의 첫 승리였다. 정지는 이 해전을 지휘한 명장이었다.
정지는 19세 때인 1365년(공민왕 14년) 과거급제를 하고 첫 벼슬을 받은 이래 승승장구했다. 43세이던 1389년(공양왕 원년)까지 23년 동안 고려 말 군사·행정에서 중책을 맡아 활약했다.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눈부신 승리를 거뒀다. 31세이던 1377년(우왕 3년) 순천도병마사로 출전해 순천과 낙안에서 왜구를 쳐부쉈다. 이듬해 영광과 광주, 동복, 옥과, 담양에서 적장의 목을 벴다. 이어 전라도순문사로 진급해 순천과 조양(보성), 진원에서 싸웠다. 1380년 광주와 능주, 화순, 경남 함양에서 승리하고 내친 김에 남원과 황산에 나가 싸워 이겼다. ‘황산대첩’은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아지발도가 이끈 왜구들을 분쇄한 큰 전투로 왜구 토벌에서 일대 전환점이 됐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 장군과 부장들이 주인공이다.
정지는 바다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1381년 해도원수로 충남 비인에서 승리했고 이듬해 남원과 군산, 충남 서천에서 승리했다. 관음포에서는 왜구를 쓸어버렸다. 1388년 창왕 원년 때에는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남원에서 승전했다. 연전 연승의 위력일까. 정지는 해도원수 겸 ‘4도 지휘처치사’로 임명된다. 정지 장군의 명성 때문인지 이후 4년 동안 서남해안에서는 왜구의 소란이 그쳤다. 동해 연안만 조금 시끄러웠다.
‘고려사’ 정지 장군 열전에는 공식적으로 23회 전투를 치러 육상 전투인 보성과 경남 함양에서만 패전했을 뿐이라고 기록돼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 시절인 828년 해상왕 장보고(張保皐·?~846)가 완도를 중심으로 청해진을 설치해 당(唐)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하면서 동북아 바다를 지배했다. 정지가 장보고의 뒤를 이어 바다 지배권을 손에 쥐었다. 다음 지배자는 조선 선조 때 이순신이다. 정지는 특히 해군 창설의 시조(始祖)로 활약한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평생 40년 동안 왜구와 전쟁
정지의 처음 이름은 정준제(鄭准提)다. 전남 나주 문평 죽곡에서 태어났다. 위엄이 있고 총명한 데다 풍모가 장대했다. 스스로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성품이었다.
어릴 때부터 왜구를 소탕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었다. 정지의 생애는 ‘왜구와 전쟁’을 벌인 1350~1392년 고려 역사 40년과 겹친다.
경상도와 전라도, 경기도, 평안도, 황해도, 심지어 함경도에 왜구가 출몰해 고려 곳곳을 유린했다. 이 때문에 국력은 쇠약해졌고 왜구와 전쟁에서 승리한 무장 세력의 힘은 자꾸 커졌다. 나중에 신흥 무장 세력의 중심인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정을 장악하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 배경이 된다.
왜구는 특별히 곡창인 호남 지역을 호시탐탐 노렸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은 배, 세곡선(稅穀船)을 노리고 도적질을 일삼았다. 심지어 해변에 상륙해 인명을 살상했다. 정지는 강과 바다로 이어지는 서남해안 물길을 모두 꿰고 있었다. 호남의 곡창, 나주 출신이어서 가능했다. 호남은 나라의 식량 창고였고, 서남해를 지키는 일은 ‘나라의 목젖’을 지키는 일이었다.
수군 편성과 훈련 필요성 건의
공민왕 23년(1374) 중랑장이던 정지는 왕에게 왜구를 평정할 수 있는 계책을 보고한다. 당시 27세였다. 왕이 기뻐하며 정지를 전라도 안무사를 겸한 왜인추포만호(왜구 소탕 직책) 직을 맡겼다. 부임하자마자 복명서를 올렸다. “해안가에서 성장한 사람과 수전(水戰)을 자청하는 사람을 뽑아 신(臣)의 지휘에 맡겨주시면 5년을 기한으로 해상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배짱이고 자신감이다. 그가 장담한 대로 육전과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둔다. 9년 후 정지는 지문하부사로 자리를 옮기자 상소를 올린다. “여러 도(道)에서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해야 합니다.” 전함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왕에게 건의한 것이다. 또 해안에서 살아 바다에 익숙한 사람과 지원한 사람을 모아서 별도로 수군을 편성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싸움배를 전문적으로 건조하는 기구를 전국에 설치하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 수군 진영을 설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오늘날 해군 편제와 비슷하다. 이뿐인가. 수군 병사들에게는 부역을 면제하고 생활이 어려운 군인을 도와 생계 걱정을 하지 않게 하자고 했다.
정지는 해상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함을 만들어 수군을 이끌고 왜구와 전쟁해 수없이 승리했다. 수군을 양성하고 신무기를 사용했다. 상륙작전을 통해 육·해군이 연합하는 전술로 적을 격퇴했다. 바다에서는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1383년 정지가 거둔 관음포 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 최무선과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 4대 대첩’으로 꼽힌다.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이등공신’
정지는 왜구 정벌책을 상소했다. “비적들이 대마도와 일기도 등지에 웅거하며 수시로 우리 해안에서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수를 쳐서 그 죄를 성토하고 출정해 도적의 소굴을 전복시켜 잔당들을 청소해야 합니다.” 고려는 1274년(원종 15년)과 1281년(충렬왕 7년) 원나라와 연합해 두 차례나 일본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이 때문일까. 대신들과 왕은 정지의 소망을 받아주지 않았다.
1388년 우왕이 이성계를 보내 요동을 공격했다. 안주도원수(安州道 元帥)인 정지도 이성계 휘하여서 함께 출전했다가 결국 회군했다. 그해 왜구가 또 창궐했는데 왜구가 정지 장군의 위세와 명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했다. 물론 왜구들을 크게 이겼다. 삼도(三道)의 백성들을 구한 것이다.
정지는 고려 우왕을 복위하려고 이성계를 죽이려다 사전에 발각된 사건에 연루돼 유배된다. 그러다 ‘윤이와 이초의 옥사’가 일어나자 청주에서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 목숨이 뭐 그리 아깝겠느냐”며 태연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정지보다 네 살 많고 과거급제를 5년 먼저 한 수문하시중 정몽주가 정지의 무죄를 호소했다.
1391년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것으로 이등공신이 돼 그 후 죄가 풀렸다. 광주로 물러나 살다가 판개성부사라는 벼슬이 내려졌지만 부임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정지의 나이 45세였다.
“선군(船軍) 창설은 정지에게서 비롯”
조선이 건국되고 난 뒤 1394년 전라도 관찰사 조박이 상소한다. “정지에게 가해진 혹독한 고문은 고려 백성들의 뼛속에 숨어들었고, 정몽주가 흘린 피는 고려 백성들의 가슴에 젖어 들었습니다.” 이들의 충성심을 인정하자는 상소였다. 태조 이성계와 중신들은 정몽주와 정지의 품성을 잘 아는지라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조는 조박의 상소를 받아들여 나주에 정려각을 세웠다. 이어 태종도 정지에게 경렬(景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종 8년인 1477년 형조판서 현석규가 성종에게 고했다. “선군(船軍)의 창설이 정지에게서 비롯됐습니다.” 그의 업적을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인조는 1644년 지금의 광주 동명동에 경렬사를 세웠지만 그 후 사원 철폐령에 따라 허물어지고 만다. 빈자리에는 지금 유허비만 남아 있다. 1921년 나주 노안면 금안동에 다시 경렬사가 세워졌다. 1974년 정지 장군 유족보존회가 창립됐고 1981년 광주 망월동에도 경렬사가 세워졌다. 경렬사 안에 남해 지역 사람들이 세운 석탑을 복원해 놓았다. 1383년 ‘관음포 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경상남도 남해에는 ‘정지 석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정지 장군 묘는 ‘예장석묘’로 국가가 예를 갖춰 조성했다. 그가 입었던 철제 환삼이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유일한 고려 시대 갑옷이어서 보물로 지정됐다.
해군 잠수함 사령부가 보유한 잠수함 중에는 ‘정지함’이 있다. 1800t급으로 2007년 6월 울산에서 진수됐다. ‘해군의 시조’로 고려 말 바다전투에서 연전 연승한 장군의 뜻을 이어 받들자는 뜻 아니겠는가.
*참고문헌 : ‘정지 장군’(정찬웅 등 공저, 시와 사람사, 2002), ‘고려사-열전’, ‘고려사절요’, ‘동국통감’(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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