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연휴, 한동훈 열풍 속에 심규진 교수가 쓴 <73년생 한동훈-보수정치의 복원과 대한민국의 미래>(2023년 새빛)를 읽었다. 출판된 지 일주일이 채 안된 책인데 한동훈 신드롬의 의미를 천착하고 있다. 책머리에 여러 사람이 추천사를 썼다. 몇 줄의 추천사가 책의 내용과 출간 취지를 간명하고 명쾌하게 일러줄 때가 많다. 서민 교수(단국대 의대)의 추천사를 보자.
“정치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장관이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한동훈 신드롬의 근원은 무얼까. (저자는) 신드롬의 근원을 분석하면서 한동훈이라는 뉴보수의 아이콘을 통해 보수진영의 승리를 위한 혁신적 전략을 제시한다. ‘한나땡’(한동훈이 나와 주면 땡큐)을 외치며 애써 그를 폄하하는 분들도 이 책을 읽어보기를 빈다.”
이양승 교수(군산대‧무역학)는 “586의 권력 도착증에 따라 한국 정치는 아수라판이 됐다”면서 “73년생이자 92학번인 한동훈은 ‘서태지 시대’ ‘신인류’ 정치 꿈나무”라고 했다. 그는 “한국 정치는 ‘분노장애’, 경제는 ‘공황장애’, 교육은 ‘인격장애’를 안고 있어서 변곡점이 필요하다”며 이 책은 그 변곡점을 찾기 위한 ‘한동훈 사용서’라고 했다. 한동훈에 대한 보수진영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586 정치 대체할 뉴보수의 아이콘
이 책의 저자는 이화여대(신문방송학)를 나와 미시간 주립대학과 시라큐스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싱가포르 경영대학 교수를 거쳐 지금은 스페인의 IE대학 경영대학에서 디지털 미디어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1년에는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한동훈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한동훈을 “경제적, 문화적, 지성적 결핍 없이 유복한 환경에서 바른 가치관과 반듯한 매너를 체화한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의 최고의 아웃풋(output‧ 산출물)으로 본다. 이런 인물이 주목받고 있는 그 자체가 한국 정치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이 양분해 주도해온 정치지형은 소명을 다했고, 그 자리를 이권 카르텔이 차지해 사익 (私益)추구에 몰두하는 구태‧적폐세력으로 변질 됐다는 것. 따라서 한동훈처럼 어디에도 부채가 없는 사람이 정치의 새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이 그를 불러냈다는 거다.
한동훈에 대한 저자의 기대는 ‘능력주의’ 대목에서 정점을 찍는다. 여기서 능력주의는 ‘한동훈표 능력주의’다. “촌스러운 ‘짠내’ 동정과 눈물, 자수성가의 신파가 없는, (여러 면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대조되는) 쿨하고 세련된 능력주의”다. 예컨대 “취업난에 시달리며 민노총 카르텔에 불만이 쌓인 젊은 세대는 능력주의가 정치적 편향성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솔루션(해법)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런 믿음도 한동훈표 능력주의와 함께 소환됐다는 것이다. 의미부여, 또는 상찬이 과도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실력 있는 분들을 모셔와야”
그럼에도 이런 인식들은 ‘한동훈 현상’을 보다 거시적, 입체적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머리 좋은 수재(秀才), 뛰어난 언변,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 차기대권 주자 등과 같은 익숙함을 넘어서서, 심지어는 ‘세대교체’라는 말조차도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깊숙이 톺아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서,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여든, 야든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것. 쉽게 말하면 한동훈 현상 앞에서 총선 공천을 눈앞에 둔 여야 중진들부터 목덜미가 서늘함을 느끼겠지만,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 그런 절박함은 한동훈 자신에게 가장 크고 무겁게 다가올 터이다. 그는 한국 정치, 나아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하고 감당할 소명의식과 진정성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하기 때문이다. 하필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눈앞의 총선(공천)이다. 정치경험이 전무한 0선의 젊은 전직 각료에게는 벅차거나 가혹한 일일 수도 있다.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면 당장 당의 비상대책위원회 구성부터 해야 한다. 일각에선 “비대위원 전원을 70년대 이후 출생자로 채워서 올드한 586 정당 민주당을 젊은 789(70, 80, 90년대 출생자들) 정당으로 심판하자(하태경 의원)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한동훈은 비대위 구성에 대해 “실력 있는 분을 모셔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능력주의, 이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심규진 교수의 ‘세련되고 쿨한 능력주의’와 같은 맥락이겠으나 조금은 신중할 필요도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가 만능의 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2년 전인 2021년 2월 1일 이 칼럼난에서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원제목 <능력의 폭정>(Tyranny of Merit 2021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샌델은 이 책에서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공동체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능력주의를 부정한다기보다는 그 ‘폐해를 지적한 것인데 샌델의 해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성공에 대한 운(運)의 기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더 겸손해지고,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사람들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건의 평등’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거다. 필자는 특급 엘리트 한동훈의 생각이 궁금하다.
가슴속의 한 가지 계책과 만권의 장서
능력주의 얘기가 나온 김에 옛날 얘기 한 토막 해보자. 말 그대로 올드한, 다들 아는 얘기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을 끌어들이기 위해 손권을 찾아갔다. 손권은 제갈량의 실력(능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나라의 내로라하는 지식인과 전략가들을 큰 천막에 모아 제갈량을 테스트하게 했다. 이들로부터 집중 검증을 받은 후 천막을 박차고 나온 공명이 일갈했다. “가슴속에 한 가지 계책도 없는 것들이 머릿속에 든 만권(萬卷)의 장서를 자랑하는구나!” 이 얘기를 듣고 통쾌함을 느낀 사람이 나뿐일까.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 중의 하나가 반(反)엘리트주의(Anti-elitism)라고 생각해왔다. 엘리트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걸 못마땅해 하거나 반대하는 대중주의 말이다. 그들은 세상을 꾸려나가는 건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 대중이라고 믿는다. 거칠게 말하면 ‘너만 잘났느냐, 나도 잘났다’는 거다. 엘리트의 존재와 가치(價値)를 인정하지 않고 심한 경우 적개심을 드러내기 일쑤인데 그 동력은 시기심(猜忌心)이다. 나는 짧지 않은 기자 생활 중 이 시기심의 덫에 걸렸다가 몸 성히 빠져나온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반엘리트주의는 포퓰리즘을 동력으로 삼는데, 때로는 양자가 서로 앞뒤를 바꾸기도 한다.
反엘리트주의와 과하지욕(胯下之辱)
어떻든 이제는 한동훈의 시간이다. 현실의 시간이다. 그로서는 민주당이 28일 강행처리하겠다고 공언한 김건희 특검법에 대한 대응이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야당의 특검법은) 총선기간에 선전 선동하기 좋게 만들어진 악법으로, 이런 점이 국회 절차 내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특검법안이 통과되고 난 후 대통령에게 수용을 건의할 가능성은 제로다. 대통령과의 이른바 수직적 관계 때문이 아니라 한때 수사와 법무행정의 총책임자로서 스스로를 부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이 될 것이다.
일부 언론은 독소조항을 없앤 뒤 총선 후 추진하는 방안을 적극 제안해야 한다고 하지만, 용산이 이를 수용할 리 만무다. 민주당의 이태원 특별법과 고 채수근 해병대 상병 사망사건 국정조사,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 등 3개 제안을 모두 수용하는 대신 김건희 특검법에서 일부 양보를 얻어내는 방안도 있을 수 있겠으나 가능성은 희박하다. 민주당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봐? 글쎄다. 그러려면 평소 민주당 사람들에 대한 ‘조롱’을 자제했어야 했다.
‘한동훈 신드롬’의 주인공, ‘보수의 희망’이 지지자들의 환호가 채 그치기도 전에 최대의 난관에 빠진 형국이다. 그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치고 나올 것인가. 정치인으로서의 성공적인 변신 여부는 여기에 달렸다. 국민은 이를 보면서 한동훈의 미래를 점칠 것이다. 그에 앞서 그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다. ‘검사 한동훈’은 이제 잊어야 한다. 한신(韓信)의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가 생각나는 성탄 연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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