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레(黎) 왕조(1428~1788)의 제17대와 19대 왕을 역임한 턴똥(Thần Tông, 神宗:1602~1662)은 베트남 역사에 여러 신기록을 남긴 왕이다. 왕위에 두 번이나 오른 특이한 기록과 아들 넷이 모두 왕위에 올랐으며,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서양 여인을 후궁으로 삼았고, 후궁들의 종족이 각기 달랐다. 턴똥(神宗)의 첫 번째 재위는 1619년부터 1643까지 24년간, 두 번째 재위는 1649년부터 1662년까지 13년간, 모두 37년간 왕위에 있었다. 베트남 역사에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이다.
1623년 찐뚱(鄭松)이 죽자 찐쑤언(鄭春)이 영주 자리를 차지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난을 일으켰다. 이에 2대 영주가 된 찐짱(Trịnh Tráng, 鄭梉:1577~1657)이 턴똥(神宗)과 손을 잡고 타인호아(Thanh Hóa)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난을 진압했다. 턴똥(神宗)이 재위한 시기는 북부의 찐(鄭)씨와 남부의 응우옌(阮)씨가 서로 상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레(黎) 왕조를 옹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다툰 극심한 남‧북 대립기였다. 남쪽의 응우옌푹응우옌(Nguyễn Phúc Nguyên, 阮福源, 1563~1635)이 북쪽의 찐(鄭)씨 세력에 굴복할 수 없음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같은 레(黎) 왕조이지만, 남쪽의 투언호아(Thuận Hóa)와 꽝남(Quảng Nam) 지방은 찐(鄭)씨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북부와는 남북으로 서로 분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1627년 2월 찐짱(鄭梉)이 남쪽의 응우옌(阮)씨 세력을 치기 위해 친정을 나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630년 5월 찐짱(鄭梉)은 왕에게 자신의 딸 찐티응옥쭉(Trịnh Thị Ngọc Trúc)을 왕비로 맞아들이라고 강압하였다. 그러나 응옥쭉은 왕의 종친인 레쭈(Lê Trụ)의 부인으로 이미 4자녀를 낳은 여인이었다. 레쭈는 당시 감옥에 있었고, 찐짱(鄭梉)은 이미 출가한 자신의 딸을 왕과 다시 결혼시킨 것이다. 조정의 대신들이 극구 반대하였으나, 왕은 실권이 없었고 자신이 영주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왕은 단지 “이미 일은 끝난 것이니 어쩔 수 없느니라.” 라고 할 뿐이었다. 이때 턴똥(神宗)은 23세, 황후는 36세였다, 후궁으로 들인 두 번째는 태국인, 세 번째는 므엉족, 네 번째는 한(漢)족, 다섯 번째는 라오스인, 여섯 번째는 네델란드 사람이었다. 네델란드 여성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은 당치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있었으나, 그녀는 대만 주재 네델란드 부책임자의 딸로, 1630년 네델란드 상선이 베트남에 왔을 때 탕롱에서 턴똥(神宗)을 만났고, 부친의 의견에 따라 베트남에 남아 턴똥(神宗) 비(妃)가 된 것이다.
1633년 찐짱(鄭梉)의 2차 응우옌(阮) 영주 정벌도 실패로 끝났다. 턴똥(神宗)을 앞세운 1643년 초 3차 정벌도 실패로 끝났다.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이 질병에 걸려 철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턴똥(神宗)은 아들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태상왕이 되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자가 18대 쩐똥(Chân Tông-真宗: 1630~1649)이다. 그러나 쩐똥(真宗)이 즉위 6년 1649년 8월에 사망하자 찐짱(鄭梉)은 자신의 장인인 태상왕 턴똥(神宗)을 다시 왕위에 앉혔다. 그래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두 번이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1657년에 찐짱(鄭梉)의 뒤를 이어 영주의 자리에 오른 찐딱(Trịnh Tạc-鄭柞)이 1661년 턴똥(神宗)을 앞세워 남진을 시도했으나 남부의 응우옌흐우젓(Nguyễn Hữu Dật)이 세 겹으로 진을 치고 강력히 방어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지치고 군량미가 동이나 결국 북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1662년 9월 턴똥(神宗)이 5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턴똥(神宗)은 왕위에 두 번이나 올라 37년간 재위했고, 남부의 응우옌(阮) 영주 세력을 치기 위해 3번이나 친정을 했었다. 그러나 모두 찐(鄭)씨 세력이 실권을 잡고 있어 재위 기간 내내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턴똥(神宗)은 영주 찐뚱의 외손자이며, 찐뚱의 뒤를 이은 영주 찐짱이 턴똥(神宗)의 외삼촌이자 장인이어서 턴똥(神宗)은 굳이 병권을 되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턴똥(神宗)이 사망하자 황후 찐티응옥쭉은 왕궁으로 데리고 온 전 남편의 딸 응옥주옌(Ngọc Duyên)과 함께 궁을 떠나 현재의 박닌(Bắc Ninh)성 투언타인(Thuận Thành)현에 있는 붓탑(Bút Tháp)사에 들어가 수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베트남어를 라틴문자로 바꿔준 프랑스 아비뇽 태생의 스페인 국적 알렉산드흐 드 호데(Alexandre de Rhodes: 1591~1660) 주교는 황후 응옥쭉에 대하여 한자에 능통하고, 시(詩)를 잘하고, 성녀처럼 수행에 열심이며 덕성이 높은 여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궁이 된 응에안 출신의 팜티응옥허우(Phạm Thị Ngọc Hậu)는 미모와 덕행을 갖춘 여인이었다. 팜티응옥허우는 19세에 친척을 따라 탕롱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턴똥(神宗)의 꿈에 전생에 선녀였다는 여인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이에 왕은 기이히 여겨 꿈속의 여인을 그리게 하여 꿈속의 여인과 닮은 여인을 찾아오도록 했다. 용모가 턴똥(神宗)의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 똑같아 후궁으로 들어오게 된 팜티응옥허우는 1654년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1662년 태자가 되었다. 그해 턴똥(神宗)이 서거하자 9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이가 후옌똥(Huyền Tông, 玄宗:1654~1670)이다. 후옌똥(玄宗)은 8년 재위 끝에 1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황태후는 불심에 의지하며 자선사업에 전념하였다.
1662년 턴똥(神宗)이 사망하자 두 살인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지아똥(Gia Tông, 嘉宗:1661~1675)이다. 지아똥(嘉宗)은 불과 1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후사가 없이 지아똥(嘉宗)이 사망하자 1662년 턴똥(神宗)이 서거 당시 임신 4개월로 후궁 응우옌티응옥떤이 낳은 턴똥(神宗)의 넷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희똥(Hy Tông, 熙宗:1663~1716)이다. 턴똥(神宗)은 왕위에 두 번이나 올랐고, 최초로 서양인 네델란드 여인을 후궁으로 삼았고, 6명의 부인 가운데 4명의 부인이 낳은 아들 4명이 각각 왕위에 오른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베트남 역사를 한국 역사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전) 조선대 교수 ▷전) 베트남학회 회장 ▷전) KGS국제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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