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선의 중국보고] '그때 그 시절' 상하이가 그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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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배인선 특파원
입력 2024-02-1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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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자웨이 드라마 '번화' 배경 상하이

  • 1990년대 개혁개방 초기 '기회의 땅'

  • 성공 꿈꾸는 소시민의 삶 그려내

  • 현실에 찌든 중국인 옛 향수 자극

중국 상하이 황푸구 황허로에 위치한 식당 타이성위안 앞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은 왕자웨이 감독의 드라마 번화에 등장해 유명세를 탔다 사진배인선 기자
중국 상하이 황푸구 황허로에 위치한 식당 '타이성위안'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은 왕자웨이 감독의 드라마 '번화'에 등장해 유명세를 탔다. [사진=배인선 기자]

"원래는 썰렁했던 황허로가 다시 시끌벅적해졌어요. 드라마 ‘번화’ 덕분이죠."

지난 8일 상하이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말이다. 총 길이 800m도 안 되는 황허로는 최근 중국에서 인기몰이한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30부작 드라마 ‘번화(繁花)’의 주무대다. 번화, 만발한 꽃이라는 뜻이다.

번화는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고속 발전하면서 기회와 희망이 가득했던 1990년대 초 상하이를 배경으로 평범한 소시민의 사랑과 성공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초호화 음식점이 즐비했던 황허로는 치열한 비즈니스가 펼쳐지던 ’총성 없는 전장’이었다. 지금은 현란한 네온사인 간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골목에 불과하지만, 드라마 인기 덕분에 관광객이 북적거린다. 

특히 극중 등장하는 고급 광둥 요릿집 ‘즈전위안(至真園)’의 모델이 된 ‘타이성위안(苔聖園)’ 앞에는 수많은 인파로 교통 체증이 생겨났을 정도다. 얼마 전부터 이곳엔 간이 신호등이 설치되고 교통 경찰이 배치됐다. 골목 곳곳엔 상인들이 드라마 포스터를 붙여놓고 여주인공이 즐겨 먹던 상하이 간식거리 파이구녠가오(排骨年糕)를 팔면서 호객 행위 중이다. 

이밖에 황푸강이 내려다보이는 와이탄의 랜드마크인 해관총서 시계탑, 1920년대 지어진 상하이의 유서 깊은 고급 호텔인 허핑반점(和平飯店), 난징루 융안백화점 등 드라마에 등장한 의미 있는 장소 앞에도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붐빈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 지어진 유서깊은 호텔 허핑반점 드라마 번화에 등장하는 이곳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 지어진 유서 깊은 호텔 '허핑반점'. 드라마 '번화'에 등장하는 이곳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배인선 기자]

상하이는 1990년대 중국 경제 고속발전의 상징적인 도시다. 사실 1990년대 초반에만 해도 허허벌판의 상하이 푸둥 지역에 동방명주 타워만 덩그러니 지어지고 있을 때다. 당시 ‘개혁개방 1번지’ 선전과 비교해 상하이는 다소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보수파 득세로 개혁개방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개혁개방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가장 먼저 상하이를 찾았다. 1991년 2월이다. 

덩은 상하이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라. 무슨 일이든 누군가 먼저 시도해야만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 첫 시도에서 실패를 준비하고, 실패해도 걱정할 것 없다”고 개혁개방을 향한 적극적인 신호를 보냈다. 

이는 드라마 속 남주인공 아바오 같은 상하이의 평범한 소시민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지폈다. 개혁개방의 물결 아래 누구에게나 도전과 성공의 기회가 주어졌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다.

“기회 앞에 모든 사람이 다 평등했고, 기회를 잡으면 인생을 바꿀 수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했고, 어떤 이들은 하루아침에 망하기도 했다.”<드라마 ‘번화’ 아바오의 독백>

“우리는 시대에 감사해야 한다.1993년 난징루를 걷다 보면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시대라는 느낌이 들었다. 운 좋게 시대를 잘 만나 그 시대와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아직 모든 것이 정의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였다.” <드라마 ‘번화’ 아바오의 독백>
 
중국 상하이 최대 번화가 난징루 야경 현란한 네온사인 간판으로 채워진 거리에 인파가 가득하다 사진배인선 기자
중국 상하이 최대 번화가 난징로 야경. 현란한 네온사인 간판으로 채워진 거리에 인파가 가득하다. [사진=배인선 기자]

공장 노동자였던 남주인공 아바오도 기회를 잡아 주식투자로 돈을 불려 사업이 승승장구하면서 ‘바오중(寶總, 바오 사장님)’으로 불리는 상하이 재계 거물이 됐다. 아바오는 1990년대 자수성가한 중국 민간 기업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많은 ‘아바오’들이 중국 경제 성장의 중요한 발판이 돼 오늘날 알리바바·텐센트·화웨이 같은 글로벌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아바오도 무일푼 처지가 되지만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과 기회를 꿈꾸는 모습이 인상 깊다.

“우리는 봄에 어떤 꽃을 피울지, 가을에 결실을 맺지 못할 수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오기를 기대한다.”<드라마 ‘번화’ 아바오의 독백>

오늘날 경제 둔화, 주가 폭락, 부동산 침체 등 현실의 고된 삶에 찌든 중국인에게 왕자웨이 감독은 희망과 꿈에 부풀었던 그때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때 그 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서글픔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중국 영화평론 사이트 더우반에 올라온 평론에서도 느껴진다. 

“1990년대 '상하이의 번화'를 목격한 사람들의 삶의 좌표 기준은 1990년대다. 그들에게 현재는 일종의 '퇴보'와도 다름없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모든 사람마다 제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무한한 기회와 희망이 충만한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경제 광명론’을 노래하라는 중국 정부의 방침에 반발한 중국 누리꾼이 미국 대사관 SNS로 몰려가 경제난을 하소연하고, 중국 관영언론의 경제 낙관주의 보도를 풍자한 ‘현대판 루쉰’ 소설에 공감하는 이유다.

‘모든 것은 결국엔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그리워질 것이다.’ 왕자웨이 감독이 드라마에 인용한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갑진년의 시작을 알리는 음력 새해가 시작됐다. 새해엔 중국 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 좀 더 활기가 넘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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